벼랑 끝 작전

트럼프는 협상장에서 갑자기 변심한 게 아니다. 벼랑 끝 전략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밀어붙였을 뿐이다.[사진=뉴시스]

미국과 북한과의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고 기업인 A씨에게 들은 얘기다. 맨주먹으로 창업해 한해 1조원 이상의 제품을 미국에 수출할 정도로 성장했던 A씨는 하노이 협상에서 보여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태도는 돌발적인 변심이 아니라 미국 특유의 협상술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은 협상이 80~90% 무르익을 때까지는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는 맘씨 좋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돌연 강성으로 돌아선다. 시간에 쫓기는 상대방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협상장을 떠나느냐의 선택에 몰린 나머지 대부분 항복해버린다.

어쩌면 벼랑 끝 작전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원조일지 모른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배경이 작용한 탓도 크지만 능란한 협상술로 정치 외교는 물론 비즈니스에까지 휘젓는 미국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쓴 자서전 「거래의 기술」을 보면 그는 마냥 허풍치고 위협하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된다. 책에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집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그냥 장사꾼이 아니라 거래를 만들어내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전략가다. 이 책에는 “사람이란 가끔 거칠게 나갈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목표를 높게 잡은 뒤 전진 또 전진” “협상장에서 상대방이 갖고 있는 물건이 ‘별거 아니다’는 인식을 주지시켜주는 게 중요하다” 등의 구절이 나온다.

미국인은 상대방을 거세게 몰아붙일 때 쓰는 모욕적인 단어가 ‘거짓말쟁이’와 ‘매국노’다. 하노이 협상에서 트럼프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 협상 때와 달리 시종일관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며 김정은 면전에서 그의 거짓을 추궁했다. 그는 김정은을 향해 “더 통 크게 가자(go bigger), 다 걸어라(all-in)”고 판을 흔들었다.

강경파인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명대타로 기용해 영변 내외의 또 다른 핵시설, 심지어 생화학무기 등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의 리스트를 꺼냈으니 30대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은 아마 아프리카 정글에서 야수를 만난 느낌이었을 게다.

트럼프 자신의 목표를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북한 핵의 50% 내외로 추정)의 포기 정도가 아니라 전면적인 비핵화로 높게 잡은 점도 책에 나온 그대로다. 북한 핵을 비싸게 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끝내 거부하자 다음에 보자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트럼프가 호텔을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협상 중 논란을 빚었던 ‘영변 핵시설의 범위’에 대한 김정은의 메시지를 황급히 들고 왔지만 미국 대표단을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북한은 이미 미국이 던진 프레임에 갇혔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회담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정은은 참모들로부터 낙관적인 보고만 믿고 방심하다가 70대의 비즈니스맨 출신 대통령의 노회함에 말려들었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경제제재 해제를 맞바꾸려는 플랜A가 좌절됐을 때 제시할 플랜 B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 경제강국론을 띄우며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을 때 김정은은 “시간이 없는데”라고 했다. 미국은 이대로 가면 2~3년 후에 외환위기가 올 정도로 북한의 경제사정이 다급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북한을 계속 밀어붙일 태세다.

핵과 경제제재 해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손에 쥐고 싶은 김정은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미국과 협상을 깨고 다시 대결국면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길을 달려왔다. 북한이 다시 ‘새로운 길’을 운운하며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려면 미국으로부터 ‘화염과 분노’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핵을 포기하자니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될까 불안해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귀국 비행기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해 중재를 당부했다. 이제 공은 한국으로 넘어왔다. 문 대통령은 중재에 앞서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가 전면적인 핵폐기인지 핵동결인지 아니면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미래핵개발을 포기하겠다는 뜻인지 국민에게 확실히 설명해야 한다. 섣불리 미국 측에 제재완화를 요구하지 말고, 김정은에게 완전한 비핵화, ‘영변+알파’를 설득에 나서야 한다.

김정은은 불과 100시간을 하노이에 머무르기 위해 7600㎞를 기차로 120시간 가까이 달렸다. 그가 오고 간 길은 ‘김일성루트’이기도 하지만 굶주림과 박해로 인해 북한을 떠난 피맺힌 도망자의 ‘탈북자루트’이기도 하다. 핵 없는 북한과,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풍요로운 한국을 꿈꾼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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