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가처분 신청 사건을 겪고 난 후 …

중국 춘추시대의 진晉나라 상경 조순은 포악한 왕 이고에게 간언을 자주하다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병권을 관장하는 사마司馬 자리에 있던 조카 조천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결국 이고는 조천의 농간으로 피살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천의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욕하지 않고 오히려 포악한 임금이 시해된 것을 은근히 기뻐했다고 합니다.

시해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 조순은 사관史官인 동호董狐가 “9월 을축 일에 진나라의 조순이 임금 이고를 죽이다”라고 기록한 사초를 보고 기절초풍합니다.
“내가 임금을 죽였다고? 없는 일을 사초에 올린 죄를 물어 그대를 죽여야겠소! 죽기 싫거든 사초를 고쳐주오.”

하지만 동호가 죽음을 불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자 조순은 비록 억울했지만 사초를 끝내 고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대신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정사를 꾸려 훌륭한 재상으로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동호직필董狐直筆이란 고사성어 스토리입니다.

진晉나라 뿐만 아니라 정鄭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나라의 대부 송은 왕을 죽일 목적으로 당시 최고 권력자인 귀생을 찾아가 협조를 구합니다. 귀생은 가담의 뜻은 밝히지 않았으나 발설은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응낙을 합니다. 결국 왕은 암살됐고, 훗날 「춘추春秋」를 집필하던 공자孔子는 이 사건에 대해 “정나라의 귀생이 임금 이夷를 죽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묵시적인 가담이나 방조의 경우에도 가장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게 공자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사회 고위층의 처신은 그 지위 만큼, 아니 그 지위 이상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꼬부랑 단어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겠지요. 요즘 인문학이 뜨면서 많은 대학과 언론이 경쟁적으로 강좌나 세미나를 열고 있고 서적과 동호회도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소재로 한 강좌나 세미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는 많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시간을 쪼개서라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책을 읽어보라고 강조합니다. 명상도 자주 해보라고 독려합니다. 이 같은 실행을 통해 감성·영감·통찰·혜안·열정이란 5가지 프로세스를 체험해보면 어떻겠냐고 술자리에서 조차 떠들어댑니다. 이 다섯 가지 단어는 경인방송 The Scoop 직원들에게 내건 회사의 미션이기도 합니다.

이런 탓인지 후배 기자들은 스승의 날에 저를 찾아오곤 해 주위 사람들을 의아해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인문학 열풍과 더불어 사회 시스템이 보다 성숙되는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언론도 발을 맞춰야 합니다.

The Scoop는 지난 8월 6일자로 ‘CJ 청부폭행 미스터리’를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힘든 과정이 따랐습니다. “집 주소를 알려 달라” “씨알도 안 먹힌다고 그러던데 좀 봐주는 게 어떠냐” “이성기, 그 사람 나쁜 사람이라더라” 등 기사를 둘러싼 지인들의 다양한 주문을 묵살하는 일은 그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막으려는 시도와 반드시 쓰려고 하는 입장이 맞서며 일어나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길 따름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CJ측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가처분신청서가 법원을 통해 우체국을 타고 날아왔습니다.

“윤리규정도 없나?”라는 외마디 한탄은 차라리 낫습니다. 신청취지를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이외수 선생의 「들개」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사회 시스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하는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8월 22일, TV나 영화로만 봤던 재판과정을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직접 겪게 됐습니다. 기사를 쓴 주인공이자, 나의 분신 같은 이윤찬 기자. 그는 연신 문자와 쪽지로 상대편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해줬습니다.
“절대로 긴장하지 말자” 수없이 대뇌에 신호를 보냈지만, 몸에서 내보내는 호르몬과 상충하며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이 부르르 떨리는 첫 경험의 그것도 느꼈습니다. 뒤에서 이 모습을 본 이윤찬 기자가 심리를 마친 후 “부르르, 보았습니다”라며 웃는 모습에 남은 긴장감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법원은 8월 29일 ‘1.이 사건 신청을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신청인이 부담한다.’로 주문을 내렸습니다.  쬐끄만 규모의 경인방송 The Scoop는 이 사건 기사로 무었을 얻었을까 돌이켜봅니다. 새벽까지 편집국 방어하랴, 매주 주간지를 내야 하는 기본기에 충실하랴, 공격에 의한 방어용 준비서면 작성하랴, 없는 돈에 변호사 수배하랴…. 거의 한달 동안 편집국 시스템이 꼬이면서 어떤 기자는 기력을 상실, 그 길고 가녀린 팔에 링거를 꽂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회사 업무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달랑 두 가지였습니다.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법조인들의 현명한 판단. 나머지 하나는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합리적이고 정당한 콘텐트를 만들겠다는 기자들의 신념이 뭉친 염력念力. 얼마 전 The Scoop는 한화 김승연 회장 법정구속을 내용으로 하는 ‘JUSTICE, at Lats’라는 기사와 함께 ‘정의가 살아나고 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이란 부제를 달았습니다.

The Scoop는 이번 기사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더욱 값진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정의가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이란 것입니다. 꽤 친분이 있는 CJ측 임원이 아직도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10년이 지난 사건을 다루느냐?” 동호직필董狐直筆과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서 솔루션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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