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파고든 착한 가격의 민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물가가 치솟고 있다. 지갑 열기가 부담스러워진 소비자를 겨냥해 ‘착한 가격’ 마케팅이 봇물을 이루는 까닭이다. 라면 한개, 아이스크림 한개 가격에도 화들짝 놀라는 소비자로선 착한 가격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착한 가격도 결국 기업의 전략이다. 착한 가격이 정말 착한지 한번쯤 따져볼 때도 됐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착한 가격의 불편한 민낯을 취재했다.

2008년 이후 라면 가격을 동결한 오뚜기는 라면을 제외한 제품 가격을 꾸준히 인상해 왔다.[사진=연합뉴스]
2008년 이후 라면 가격을 동결한 오뚜기는 라면을 제외한 제품 가격을 꾸준히 인상해 왔다.[사진=연합뉴스]

# “안 오르는 것 없이 다 오른다.” 주부 김소영(36)씨는 요즘 장보기가 겁이 난다. 치솟을 대로 치솟은 식품가격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들어 고추장, 된장부터 즉석밥, 어묵, 빵까지 잇달아 가격이 올랐다. 지난해 9월 115.2(2015년=100)까지 올랐던 소비자물가지수(식료품ㆍ비주류)는 여전히 109.5(2월)로,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 릴레이 가격 인상에 혀를 내두르는 소비자가 많아지자 ‘거꾸로 가는’ 기업들이 등장했다. ‘착한 가격’을 표방하며 제품 가격을 종전보다 낮추거나 동결하는 방식이다. 고물가에 지갑을 탈탈 털린 소비자로선 ‘착한 가격’에 눈이 번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착한 가격은 정말 착할까.

■갓뚜기 열풍에 숨은 가격 인상 = 오뚜기는 착한 가격의 대표주자다. ‘갓뚜기(God+오뚜기)’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오뚜기를 지지하는 소비자가 숱하다. 2008년 진라면 가격을 750원으로 100원 인상한 것을 끝으로 11년째 가격을 동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너 일가의 선행 소식은 갓뚜기 열풍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라면류를 제외하면 오뚜기는 ‘착한 기업’으로 불릴 자격이 사라진다. 라면을 뺀 제품가격을 꾸준히 인상해 왔기 때문이다. 오뚜기는 2017년 11월 즉석밥과 참치 제품군의 가격을 평균 9.2%, 6.7% 인상한 데 이어 지난해 6월에는 16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20%가량 인상했다.

며느리도 모르게 조용히 가격을 끌어올린 주요 품목은 자른당면(5100원→6500원) 27.5%, 사과식초(360mLㆍ900원→1100원) 22.2%, 맛있는 북어국(2800원→3100원) 10.7%, 오뚜기 순후추(100gㆍ3400원→5000원) 47.0% 등이다.

오뚜기 관계자는 “제반비용 상승으로 가격 인상이 불가피했다”면서 “출고가를 인상하거나, 할인율을 조정해 채널별로 판매가가 다른 것이지 47% 가격 인상은 과장됐다”고 말했다. 오뚜기를 ‘착한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라면가격 동결이 실은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오뚜기와 같은 후발업체는 통상 가격대를 낮게 책정해 경쟁하면서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사용한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오뚜기는 진라면 가격을 동결한 후 시장점유율 상승 효과를 누렸다. 2010년 9.5%(이하 AC닐슨) 이던 오뚜기의 라면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26.2%로 2배 이상 훌쩍 뛰었다. 

■민생라면은 왜 390원인가 =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민생라면’은 이름에서부터 민생을 부각하고 있다. 낱개 가격이 390원으로 할인마트 최저가 라면이란 타이틀도 얻었다. 이 때문인지 민생라면은 날개 돋힌 듯 팔렸다. 2월 14일 이마트에서 판매를 시작한 지 3주 만인 3월 8일 100만개 판매량을 돌파했을 정도다. 숱한 미디어들도 “일반 봉지라면보다 50%나 싸다” “신라면의 반값이다”면서 민생라면을 추켜세웠다. 이마트 역시 “이 가격이 실화인지 확인하라”며 거품을 쭉 뺀 가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민생라면은 착한 제품일까. 사실 이마트의 민생라면은 이마트24의 PL(Private Label) 상품으로, 개당 550원이었다. 그런데 이 제품이 PL치고 인기를 끌자 이마트가 판매를 시작했고, 가격을 390원선으로 떨어뜨렸다. 390원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마트는 이미 ‘3분라면’이라는 PB (Private Brand) 상품을 팔고 있는데, 가격은 396원이다.

이마트24에서 시작된 인기에 ‘착한 제품’이란 홍보용 옵션을 붙이기 위해 396원의 밑으로 가격을 설정했다는 얘기다. 업계 안팎에서 “반값이 아닌 PB라면보다 6원 더 싼 가격으로 생색내기만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제값 내고 먹는데 가성비 = ‘가성비’를 앞세우고 수입맥주의 인기를 파고든 ‘발포주’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가성비가 좋다는 인식과 달리 소비자는 제값을 주고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내 발포주 시장을 연 하이트진로의 예를 들어보자.

이 회사가 2017년 4월 출시한 발포주 ‘필라이트’는 올해 3월까지 5억캔이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다. 수입맥주에 밀려 침체를 겪던 국내 맥주업계에 돌풍을 일으킨 셈이다. 필라이트의 성공을 본 오비맥주도 1월 발포주 ‘필굿’을 출시했다. 필라이트ㆍ필굿은 ‘12캔에 만원(355mL)’에 판매되면서 ‘4캔에 1만원(500mL)’하는 수입맥주보다 저렴한 가격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발포주가 저렴한 건 10% 미만에 불과한 맥아의 함량 덕분이다. 주세법에 따르면 맥아 함량이 10%에 못 미치는 맥주는 기타주류로 분류된다. 맥아 함량이 60~100%에 이르는 일반 맥주의 경우, 출고가의 72%가 세금으로 붙지만, 기타주류는 세율이 30%에 불과하다. 일반 맥주 대비 세금이 42%포인트 낮은 셈이다.

게다가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 함량이 낮고 보리ㆍ쌀ㆍ전분 등 다른 원료의 비율이 높아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실제로 필라이트ㆍ필굿의 출고가는 717원(335mL)로 일반 레귤러 맥주(1239원) 대비 42%가량 저렴하다. 맥주업체로선 세금 혜택과 원가 절감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데다 ‘착한 가격’의 맥주라는 이미지까지 얻은 셈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발포주는 세금이 저렴해 일반 맥주 대비 낮은 가격대에 판매할 수 있다”면서 “소비자는 세금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제값 주고 먹는 셈이다”고 말했다. 

■착한 가격도 한철 장사 = 맥도날드는 2005년부터 런치할인제도인 ‘맥런치’를 운영했다. 세트 상품을 정가 대비 20%가량 할인해주는 ‘착한 프로모션’으로 맥도날드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맥도날드는 지난해 3월 ‘맥런치’를 슬쩍 폐지하고, 또 다른 ‘착한 가격’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그게 바로 ‘맥올데이’였는데, 할인폭이 버거 3종 세트(더블불고기버거ㆍ슈슈버거ㆍ빅맥)의 가격을 상시 500원(약 10%) 깎아주는 것에 불과했다. 진짜 착한 가격을 없애고, 혜택을 대폭 줄인 착한 가격으로 포장한 셈이다.

착한 가격 마케팅의 수혜는 기업이 본다.[사진=연합뉴스]
착한 가격 마케팅의 수혜는 기업이 본다.[사진=연합뉴스]

맥도날드의 단품 브랜드 ‘행복의 나라’도 1000~2000원 수준의 착한 한끼로 2012년 론칭했지만, 최근 가격을 끌어올리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맥도날드가 지난 2월 행복의 나라 메뉴에 3000원대 에그불고기버거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관계자는 “고객에게 부담없는 가격대 제품도 꾸준히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렇게 착한 가격은 소비자 모르게 조금씩 가격이 오르거나, 칭찬 받을 만큼 착한 가격이 아닌 경우가 많다. ‘반값 할인’이라고 써놓으면 소비자는 믿고 산다. 가성비가 높다고 하면 의심하지 않고 바구니에 담는다. 요즘처럼 고물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수혜는 기업이 본다. 착한 이미지로 포장되고, 실적도 개선되는 경우가 많다. ‘착한 기업’으로 불린 오뚜기의 실적은 2011년 매출액 1조6013억원, 영업이익 848억원에서 지난해 2조2468억원, 1517억원으로 각각 296.3% 40.3% 증가했다. 주가도 상승곡선을 그렸다. 2011년 3월 29일 13만원이던 오뚜기 주가는 76만1000원(3월 28일)으로 485.4% 증가했다.

‘가성비’ 맥주를 내세운 하이트진로도 필라이트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지난해 필라이트의 매출 비중이 23.6%(맥주부문ㆍKB증권 추정치)로 훌쩍 뛰면서 맥주 부문 실적의 내실이 강화됐다. 하지만 착한 가격은 어찌보면 ‘마케팅의 수단’일 뿐이다. 고작 6원 내려놓고 ‘반값 홍보’를 하거나 다른 제품의 가격은 모조리 올려놓고 ‘특정 제품’ 하나로 착한 가격을 운운하는 건 대표적 사례다.

김시월 건국대(소비자정보학) 교수는 “기업으로선 착한 가격을 내세워 이미지를 개선하고, 미끼 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서 “결국 착한 가격이 정말 가성비 좋은 착한 상품인지는 소비자가 꼼꼼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비자 스스로 판단해야

양세정 상명대(소비자주거학)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다. “오늘날 소비자는 수많은 제품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소비자가 실제로 얻는 정보는 인터넷이나 SNS상에서 이슈가 된 일부분일 뿐이다. 기업들이 ‘착한 가격’과 같은 눈에 띄는 전략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이유다. 소비자는 ‘착하다’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끌려 제품을 구매하게 되지만, 정말 착한 가격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양 교수는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쉽게 비교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도 꼬집었다. “제품의 중량이나 포장 등을 바꾸는 방식으로 소비자가 가격을 한눈에 비교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도 숱하다. 소비자가 더 꼼꼼해지거나 기업의 전략이 우아해져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소비자가 제품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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