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로37길서 본 어린이 보호구역의 그림자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와 사람이 함께 다녀도 놀랄 일이 아니다. 때론 유모차와 화물차가 뒤섞이기도 한다. 놀랍게도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인도와 차도를 나누는 건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호울타리나 과속방지턱도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걸 알려주는 도로 위 적색 포장도 과하니까 시공하지 말 것을 권장한다. 반쪽짜리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전락한 당산로37길은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당산로37길에 직접 가봤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도로보행물 설치는 의무가 아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4월 2일 오전 7시 30분.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당산로37길의 양옆은 불법주차와 노상 주차장으로 차량이 늘어서 있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었다. 양방향으로 드나드는 차량 사이로 학생들이 엉켰다. 당산로37길과 접하는 물류센터 부지에서 1t 트럭이 빠져나오자 나란히 걷던 학생들은 한쪽으로 비켜섰다.

등교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3시. 이번엔 어린이집에서 할머니·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당산로37길을 채웠다. 과속방지턱도 없고, 방호울타리도 없는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유모차와 트럭이 위험하게 섞였다. 도로 바닥에는 ‘천천히’나 ‘어린이 보호구역’이라 문구 대신 ‘주거지역 우선주차’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 어린이 보호와 거리가 먼 이유는 뭘까. 문제는 법에 있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라 하더라도 보행자를 보호하는 도로부속물 설치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이·노인 및 장애인 보호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유치원, 초등학교의 정문에서 반경 300 m는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

문제는 지정 이후다. 과속방지턱·방호울타리 등 안전을 위한 도로부속물이 대부분 권고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미끄럼을 막고, 시각적 효과가 있는 ‘적색 포장’마저 시공하지 말 것을 권장한다. ‘과하다’는 이유에서다.

다시 반쪽짜리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전락한 당산로37길을 보자. 이곳은 이면도로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고 차량도 일방통행하지 않는다.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 통합지침(2015)’에 따르면 이면도로의 경우 최소폭 1.2m의 보행로를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도로부속물을 설치할 수 없다면 도로색을 다르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보행로를 확보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산로37길에는 그 흔한 보행로 선조차 그어져 있지 않다.

도로부속물 설치를 결정하는 영등포구청은 4월 말에야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당산로37길에 조선선재 물류센터가 착공하는데, 이 시기에 맞춰 주민들과 협의하고, 방호울타리 등을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어린이 안전이 의무가 아니기에 발생한 뒤늦은 조치다. 법이 강제하지 않는 이상 반쪽짜리 어린이 보호구역이 당산로37길 뿐일까.

경찰청에 따르면 어린이 보호구역 요건을 충족하는 곳은 전국 2만1273개교다. 이 중 실제로 지정된 곳은 1만676 5개교. 78% 수준이다. 조치도 형편 없지만 그 수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어린이 보호구역의 불편한 민낯이다.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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