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에 상처 받은 사람들

도시재개발은 특유의 ‘수직성’ 탓에 비판을 받았다. 무차별적인 철거가 원주민을 쫓아내는 전략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도시재생’이다. 늙은 도시를 철거하지 않고 원주민들과 함께 되살리겠다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도시재개발이든 도시재생이든 밀려날 사람들은 밀려났다. 중요한 건 용어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도시재생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15년 전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떠밀려난 상인들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15년 전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떠밀려난 상인들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두번 내몰린 내 인생 = 2005년 10월, 청계천에 새 물길이 열렸다. 콘크리트로 덮인 지 44년 만이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숙원사업이자, 도시재생 사업이었다. 도시에 자연생태적 요소를 되살린다는 점, 기존 상인의 생존대책을 마련했다는 점 모두 특별해 보였다. 수만명의 시민이 모여 복원을 축하했지만, 웃음기 없이 이 광경을 보던 사람도 있었다. 청계천 인근에서 옷가게를 하던 유산화씨였다. 

유씨는 청계천이 제2의 고향이다. 1989년부터 청계천 삼일아파트 골목에 식당을 차린 유씨의 어머니가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음식 솜씨가 알려지면서 제집처럼 드나들던 단골도 많았다. 하루 매출이 200만원을 훌쩍 넘을 정도로 붐볐던 게 유씨의 기억이다. 유씨 역시 동생과 함께 어머니 식당 옆에 자리를 잡고 옷을 팔기 시작했다. 6만여개 점포, 22만여명의 상인이 밀집한 청계천변 상가에는 주말이면 사람이 그득했다. 유씨의 옷장사도 마찬가지로 순탄했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본격화할 때도 유씨는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서울시의 약속 때문이었다. 동남권유통단지로 상가를 옮기면, 30%가량 싼 가격으로 임대ㆍ분양해 주겠다고 했다. 유씨에겐 오히려 기회 같았다. 잘 정돈된 쇼핑몰에서 매장을 운영하면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입주를 포기하는 상인들이 속출했다. 공사비용이 늘었다는 이유로 당초 약속했던 7000만원가량의 분양가격이 1억5000만원으로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청계천 상가 6만여점 중 실제로 계약한 상인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들었지만 유씨는 꾹 참았다. 치솟은 분양가는 대출로 해결했다. 

물길 복원됐지만… 

그렇게 2010년 6월, 유씨는 가든파이브 리빙관 지하 1층에 수입 잡화와 의류 점포를 열었다. 이때부터 유씨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개장 이후 1년여간 옷을 단 한벌도 팔지 못했다. 백화점이 들어온다고 공사를 시작한 탓인지 매장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은 있었다. 서민 행보를 이어가던 박원순 신임 서울시장이 가든파이브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한낱 물거품처럼 꺼졌다. “우리 좀 살려달라”는 유씨의 외침은 “어쩔 수 없다”는 답변에 막힐 뿐이었다. 결국 유씨는 2014년 관리비와 임대료가 밀려 명도소송을 당해 쫓겨나왔다. 두번째 내몰림이었다. 

이후 유씨는 오갈 데 없는 이에게 좌판 자리를 내주는 경의선 공유지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공덕역 인근에 있는 철도부지로 시민시장으로 운영하다 사용 기한이 종료돼 남은 상인이 모여 있는 곳이다. 틈틈이 마포구청에서 “떠나라”란 요청을 받고 있다. 언제 또 내몰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가든파이브는 청계천 일대 상인의 이주 상가로 지어졌지만, 현재 이곳에 머무는 상인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사진=연합뉴스]
가든파이브는 청계천 일대 상인의 이주 상가로 지어졌지만, 현재 이곳에 머무는 상인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사진=연합뉴스]

그 무렵 속앓이를 하던 유씨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서울시는 돼지껍질ㆍ곱창ㆍ해장국 등을 팔던 유씨 어머니에게 생활용품 판매를 배정했다. 기가 찼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유씨가 바람을 전했다. “당시 청계천 사람들의 삶은 망가졌지만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사람이 살아야 동네도 살 수 있다는 걸 윗분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으면 좋겠습니다.” 

■ 뜨는 동네, 젠트리피케이션 = 이경화(가명)씨가 연남동 인근에 작은 공방을 연 건 2012년 8월이었다. 골목 어디로 발길을 옮겨도 한산한 분위기는 작업에 열중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큰돈을 벌 만한 목이 아니었는데 제법 장사가 됐다. “홍대 인근의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밀려왔다”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이웃이 됐다. 

조용한 동네 분위기가 바뀐 건 2016년. 도시재생사업으로 진행된 ‘경의선숲길’이 완공되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특히 연남동 구간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뜻에서 ‘연트럴파크’라는 애칭도 갖게 됐다. 

처음엔 이씨도 연남동이 뜨는 게 마냥 좋았다. 이씨의 작품이 신기한지 외국인 관광객이 기웃할 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며 당황했던 기억도 있다. 잔디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던 시민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연남동의 변화는 숲길이 생긴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둘러보니 공방 골목 주변은 아기자기한 카페와 트렌디한 상점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씨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주인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건물주는 임대료를 올려달라는 압박을 시시때때로 넣었다. 매출이 그대로인데 어떻게 임대료를 더 주느냐고 버텼지만 오래 견딜 사안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씨는 2017년 주변 동료를 따라 임대료가 저렴한 편이라는 문래동으로 터를 옮겼다. ‘도시재생 사업→새 건물주 등장→임대료 상승→내몰림’의 뻔한 젠트리피케이션 공식을 겪은 셈이다. 

지금도 이씨는 종종 연남동 골목을 들른다. 주요 약속장소로 꼽힐 만큼 핫플레이스가 됐기 때문이다. 이씨의 공방은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했다. 화려하게 바뀐 동네 풍경을 바라보는 이씨의 심정은 복잡다단하다. 지금 터전인 문래동에서도 언제 밀려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등포 경인로 주변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선정된 이씨의 새로운 터전 주변엔 각종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다. 구청 주도로 건물주와 상생협약을 체결했다지만, 법적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다. 이씨는 “도시재생도 결국 토목사업 아닌가”라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재생이 주는 어감이 전처럼 밝게 느껴지지 않는다. 재생이든 뭐든 밀려날 사람들은 밀려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 = 세운상가 인근에서 조명가게를 운영하는 김씨 부부는 15년 전 청계천 복원사업 때도 이주하지 않고 버텼다. 서울시장이 두번 바뀌고, 김씨 부부의 가게 주변으로 계획된 재개발 사업이 수차례 난항을 겪는 가운데서도 둥지를 지켰다.  

산업생태계 특성상 주변 공구상가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책상엔 소송 관련 자료와 내용증명 서류가 빼곡히 쌓여있었다. ‘을지면옥 사태’로 이 지역 상권이 미디어의 집중 관심을 받고 있지만, 김씨 부부는 달갑지 않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어서다. 

문제는 보금자리에서 내몰린 이후의 삶이다. 김씨 부부는 “정말 황당한 건 서울시가 검토 중인 이주후보지에 가든파이브가 있다는 겁니다. 가든파이브로 옮겨간 제 옛 동료들의 어떻게 살았는지 저희가 모를까봐서요. 임대료를 못 내 공사판을 전전하고, 자살을 시도한 이도 있었습니다. 청계천 상인들에겐 공동묘지 같은 그 곳을 검토하고 있다니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사업을 진행하는 게 맞습니까.” 서울시 도시 정책 슬로건이 ‘사람 중심 도시재생’이란 걸 떠올리면 참 아이러니하다. 그 그늘에는 늘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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