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한산도❻

원균이 부임한 후 계책을 도모하던 제승당은 애첩과의 밀회 장소로 전락했다. [사진=연합뉴스]
원균이 부임한 후 계책을 도모하던 제승당은 애첩과의 밀회 장소로 전락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을 중건하고 제승당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규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을 보좌하던 장수와 사졸 등을 다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李英男은 자신이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 원균은 사랑하는 첩과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이중 울타리로 운주당의 안팎을 막아버렸다. 장군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또 술을 즐겨 먹고 날마다 술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을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왜놈을 만나면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장군들도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는 동시에, 원균이 두려워 군사 일을 제대로 아뢰지 않게 되므로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번역 : 코리안스피릿, 장영주의 국학칼럼 2015년 9월 15일자 중에서]


제승당 바로 옆에는 유명한 수루戍樓가 있습니다. 제가 한산도 여행기의 첫머리에 옮긴 그 유명한 시에 등장하는 ‘수루’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한산정도 있습니다. 약 1500일에 걸친 「난중일기」 중에서 1000일을 넘는 기록이 이곳 한산도에서 쓰였습니다. 
이순신이 일기쓰기만큼이나 많이 한 것이 바로 활쏘기였습니다. 한산정은 한산도 제승당 바로 뒤에 있는 활터의 이름입니다.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한산도의 최북단에는 대섬竹島이 있다. 화살대를 공급하던 곳이다. 그 아래쪽에는 해갑도, 비산도, 상혈도, 하혈도, 좌도, 송도, 유자도 등 작은 섬들이 있다. 북쪽의 비추리는 군함을 만들던 곳이며, 망골은 바다의 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이었으며, 야소는 군기창이 있었던 곳, 개미목은 왜적 패잔병이 개미처럼 붙어 있던 곳이라고 해 이름 지어졌다. 진두는 진을 친 장소라는 뜻으로, 현재 한산면의 행정소재지가 있다. [위키백과]

한산도에서 대마도 정벌도 했다니, 한산도는 여러모로 승리의 터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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