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어둡고, 시스템 약하고…
SK하이닉스의 어두운 갈림길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육성 사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1조여원의 지원 계획도 발표했다. 여기에 발맞춰 삼성전자도 133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혔고, 전방산업에서도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돕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웬일인지 국내 반도체 2위 업체인 SK하이닉스는 잠잠하다. 메모리 반도체(낸드플래시)의 경쟁력을 키우기에도 벅찬 데다,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기엔 기반이 부실해서다. 더스쿠프(The SCOOP)가 SK하이닉스의 어두운 갈림길을 취재했다. 

SK하이닉스는 시스템 반도체 대신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사진=연합뉴스]
SK하이닉스는 시스템 반도체 대신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사진=연합뉴스]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재 화두는 비非메모리(시스템) 반도체다.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해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국내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반도체 산업은 물론 국내 경제를 지탱했던 메모리 반도체 호황이 저물면서 시스템 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시스템 반도체는 시황에 따른 변동성이 적어 안정적인 실적을 올릴 수 있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기술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선 시스템 반도체 기술력이 곧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질 거란 전망도 많다.

이 때문인지 정부도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플랜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인 팹리스 시장의 점유율을 10%(현재 1.6%)로 끌어올리고, 생산 분야인 파운드리 시장에선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구체적 목표까지 세웠다. 

지난 4월 30일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지원방안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이렇다. “향후 10년간 1조여원(자율주행차용 반도체 143억원ㆍAI 반도체 2475억원 등)을 투자하고, 기업의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연구ㆍ개발(R&D) 및 시설투자 비용의 세액을 공제한다. 5대 전략분야에서의 반도체 수요를 창출하고, 시스템 반도체 개발 인프라를 구축한다. 대학에 관련 학과를 신설해 전문인력 육성에도 힘을 쏟는다.” 

과기부에 따르면 R&D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 사업이 1조원 규모를 넘은 건 지난 5년 동안 이번이 유일하다. 이번만큼은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는 얘기다.

기업들의 움직임도 이전과 다르다. 국내 1위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33조원(R&D 73조원ㆍ생산시설 60조원)가량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연간 투자비용으로 따지면 13조여원인데, 이는 삼성전자의 연간 총 R&D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ㆍ바이오ㆍ가전ㆍ로봇ㆍ에너지산업에 속한 시스템 반도체 수요 기업들도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약속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과거엔 정부와 기업의 손발이 맞지 않아 시스템 반도체 육성 사업이 성과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이번엔 기업들도 적극 협업에 나서고 있어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반도체 산업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이런 분위기에서 동떨어져 있다. SK하이닉스의 사업 투자계획에 시스템 반도체는 없어서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시스템 반도체가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비중이 큰 것도,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방향인 것도, 트렌드인 것도 맞다”면서도 “하지만 지금의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해야 할 게 많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가 섣불리 시스템 반도체에 투자하지 못하는 이유를 낸드플래시에서 찾는다. 낸드플레시의 경쟁력이 뒤처지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메모리 반도체는 크게 D램과 낸드플래시로 나뉜다. 그중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의 점유율이 신통치 않다.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선 29.1%의 점유율로 2위를 기록했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선 10.8%를 점유해 5위에 그쳤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인 데다, 비메모리에서도 어느 정도 실적이 있기 때문에 비메모리 반도체에 신경을 쓸 여력이 있다”면서 “하지만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를 키우기에도 벅찬 상황인데 비메모리까지 요구할 순 없다”고 말했다.

물론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보다 전망이 밝은 시스템 반도체를 선제적으로 육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시스템 반도체 기반 역시 부실하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에선 모바일기기에 탑재하는 이미지센서(CIS)를 판매하고 있지만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자릿수 에 불과하다. 

2017년 5월 SK하이닉스시스템IC로 분사한 이후 지난해 흑자전환에 성공한 파운드리 사업부 역시 영업이익(2018년 551억원)이 크지 않다. 한태희 성균관대(반도체시스템공학)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SK하이닉스가 시스템 반도체에서 성과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라서다. 시스템 반도체로 성과를 보려면 인수ㆍ합병(M&A)을 하는 게 현실적이지만 당장 M&A를 할 만한 기업도 없고, M&A를 한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분야가 다양하고 분야별 강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제품을 만든다고 수요가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셈인데, 이런 상황은 SK하이닉스를 주저하게 만들 만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본격 진출하려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수익성이 있다는 판단이 서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고선 시스템 반도체에 투자하기엔 리스크가 크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로선 시스템 반도체에 투자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유리한 낸드플래시를 키우는 게 우선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시스템 반도체에 초점이 맞춰지는 현 상황이 SK하이닉스로선 달갑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정부 지원이 시스템 반도체에 집중됐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언제 반등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불황 찾아온 반도체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시장의 연간 성장률이 -7.4%까지 떨어질 전망인데, 이는 일부 시스템 반도체를 비롯해 D램과 낸드플래시의 수익률이 하락한 탓이 크다. 그중에서도 공급과잉과 수요악화 문제를 겪고 있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연간 매출 감소폭이 가장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마이슨 로블즈 브루스 IHS마킷 리서치팀장은 “반도체 업체들은 올해 반도체 시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했지만 시장이 급속도로 악화하면서 우려가 더 많아졌다”면서 “최근 데이터는 반도체 산업이 10년 만에 최악의 불황기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분간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SK하이닉스엔 좋지 않은 시그널임에 분명하다. 반도체 열풍을 타고 승승장구하던 SK하이닉스에 제동이 걸릴 판이다. 전공분야인 메모리 시장의 미래는 어둡고, 부전공인 시스템은 실력이 한참 모자라서다. SK하이닉스가 갈림길에 섰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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