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사진관] 뇌를 다친 딸의 선물, 그건 기적이었다
[천막사진관] 뇌를 다친 딸의 선물, 그건 기적이었다
  • 이윤찬 기자
  • 호수 388
  • 승인 2019.05.20 08: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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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사진관 제15편 박주현 대표
엄마 박주현 대표의 눈물과 희망
국내 최초로 장애인옷 규격 만들어
장애인옷 업체 베터베이직의 꿈
박주현 베터베이직 대표와 둘째딸 윤재. [사진=오상민 작가]
박주현 베터베이직 대표와 둘째딸 윤재. [사진=오상민 작가]

뇌를 다친 채 태어났다. 의료사고 탓이었다. 아이의 몸은 갈수록 뻣뻣해졌다. 먹는 것도 앉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옷 입는 것까지 괴로움이 됐다. ‘뇌병변(뇌문제로 나타나는 장애)’의 무서운 후유증이었다. 장애인 옷 전문업체 ‘베터베이직’의 박주현(48) 대표. 눈물도, 곡절도 숱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편한 옷을 입히기 위해 ‘재봉틀’을 손수 돌렸다. 해외 장애인용 보디슈트를 참조해 옷의 앞·옆·뒤를 터봤다.  

이렇게 만들어진 ‘트임방식’은 놀랍게도 국내특허로 이어졌다. 2018년엔 장애아를 둔 엄마들과 함께 ‘장애인옷 표준규격’을 개발·발표했다. 

박 대표는 “아프지만 단단한 아이와 장애아를 둔 엄마들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했을지 모른다”며 “옷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그를 만났다. 15번째 주인공이다. 

“윤재는 늘 저에게 숙제를 내줘요. 저는 그걸 풀어가며 살아왔죠.” 아프지만 단단한 윤재는 박주현 대표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윤재는 늘 저에게 숙제를 내줘요. 저는 그걸 풀어가며 살아왔죠.” 아프지만 단단한 윤재는 박주현 대표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1장. 붉은 얼굴     

“무슨 말씀 하시는 건가요? 지금!” 퉁퉁 부은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얼마나 힘껏 소리를 쳤는지 호흡마저 안 됐다. 엄마의 신경은 칼끝처럼 곤두섰다.  

“아기를 포기하자, 뇌가 죽었단다.” 아픈 말을 어렵게 꺼낸 친척들의 얼굴도 붉게 탔다. 며칠 전 태어난 갓난아기였다. 엄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숨은 쉰다면서요. 포기라니요. 그 뜻이 뭐예요, 애를 죽이자는 건가요?”  

10년 만에 가진 둘째였다. 첫애 때의 낯섦보단 설렘이 많았던 임신기간이었다. 엄마는 별 같은 아기를 꿈꿨고, 별이 반짝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은 엄마의 작은 소원을 외면했다. 둘째는 ‘몸이 축 늘어진 채’ 엄마의 배에서 나왔다. 숨은 간신히 붙어 있었지만 뇌의 99%가 죽은 상태였다. 의료사고였다.   

엄마는 격해졌다.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 모질게 성을 냈다. 모성애, 엄마로서의 책무, 죄스러움…. 이런 숭고한 감정이 아니었다. 본능의 무의식적인 표출이었다. 엄마는 그날밤 하얀밤을 지새웠다. 머릿속도 하얬다.  

“정말 오랜만에 꺼내보네요.” 박주현 대표가 윤재를 임신했을 때 만들었던 베냇저고리. 윤재에겐 한번도 입혀보지 못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정말 오랜만에 꺼내보네요.” 박주현 대표가 윤재를 임신했을 때 만들었던 베냇저고리. 윤재에겐 한번도 입혀보지 못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선생님, 이상해요” 

첫애가 태어난 건 1997년이었다. 행복이 넘쳤지만 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했고, 대출금도 갚아야 했다. 여느 중산층처럼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힘겨운 삶과 부대꼈다.  

그렇게 10년, 삶은 안정됐다. 집이 생겼고, 첫째딸은 어여삐 컸다. 아빠와 엄마는 둘째를 갖기로 했다. 첫째가 동생을 바라기도 했지만 엄마도 설렘을 느끼고 싶었다.  

조용히 엄마의 배 속에 찾아온 둘째. 엄마는 모든 걸 다했다. 산전産前 검사는 물론, 태교에도 정성을 쏟았다. 한없이 즐거웠다. 둘째의 몸짓만 느껴져도 행복이 밀려들었다.  

그로부터 10개월여가 흐른 2007년 8월 22일.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왔다. 오전 9시, 다니던 강남 A산부인과에 도착한 엄마는 침상에 누웠다. 태아의 상태를 그래프로 볼 수 있는 모니터와 심장소리가 들리는 스피커가 달려있었다.  

엄마의 배에 3~4개의 패드를 붙이자 ‘쿵쿵’ 심장소리가 울렸다. 엄마는 장단을 맞췄다. “둘째야, 조금 후에 만나자!”  

윤재는 스스로 눈을 감지 못한다. 뇌에서 근육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윤재의 눈을 시시때때로 감겨주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윤재는 스스로 눈을 감지 못한다. 뇌에서 근육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윤재의 눈을 시시때때로 감겨주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마는 첫째 때처럼 ‘유도분만제’를 맞았다. 그래서 진통의 속도가 규칙적으로 빨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엄마만 느낄 수 있는 감感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불규칙한 통증이 반복됐다. 모니터 속 그래프도 들쭉날쭉했다. “이상하다.” 직감으로 위험신호를 느낀 엄마는 담당의사를 불렀다. 유도분만제를 맞은 지 1시간30분쯤 지났을 때였다.  

엄마: “이상해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담당의사: “원래 그래요. 자궁문이 열리지도 않았어요.”  
엄마: “첫째 땐 이렇지 않았는데 …”  
담당의사: “우리가 더 잘 알아요.”  

엄마의 직감은 의사의 말 한마디에 묵살됐다.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선 의사 말이 곧 권력이었다. 엄마는 권력 앞에 힘없는 존재였다.  

가래를 빼주는 석션기는 윤재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다. 가래를 제때 빼내지 못하면 호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박 대표가 석션기의 상태를 하루에도 몇번씩 점검하는 이유다. 왼쪽부터 전기방식, 배터리방식, 수동방식. [사진=오상민 작가]
가래를 빼주는 석션기는 윤재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다. 가래를 제때 빼내지 못하면 호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박 대표가 석션기의 상태를 하루에도 몇번씩 점검하는 이유다. 왼쪽부터 전기방식, 배터리방식, 수동방식. [사진=오상민 작가]

# 3장. 방치와 직감  

사실상 방치였다. 엄마는 간호사에게 몇번이나 이상징후를 말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기다리세요’였다. 문제는 오후 3시께 터졌다. 모니터 속 그래프가 갑자기 멈췄다. 심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에 ‘섬뜩한 바람’이 일었다. 간호사를 불렀다.  

엄마: “정말 이상해요. 심장소리가 안 들려요.”  
간호사: “기계가 가끔 그래요. 괜찮아요.”  

급한 건 엄마였다. 배에 붙어있는 패드를 떼서 이리저리 대봤다. “아기 어딨지? 소리가 왜 안 나지?” 회진을 돌던 담당의사가 엄마를 본 건 그때였다. 

엄마는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안 들려요. 기계가 고장났나요? 괜찮나요?” 그 순간이었다.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아기 머리가 보이잖아. 수술방 빨리 잡아!” 

엄마는 멍해졌다. 배가 아파야 아기가 나온다는 건 자연의 법칙인데, 산고産苦가 없었다. 아기가 아프다는 역설적인 징조였다. 엄마의 침상은 수술실로 빠르게 옮겨졌다. 의료진에게 ‘뭔가 이상하다’고 털어놓은 지 반나절이나 흐른 후였다.

박 대표가 윤재의 가래를 뽑아주는 모습. 이처럼 뇌병변 장애인은 사소한 비장애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불편함과도 싸워야 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박 대표가 윤재의 가래를 뽑아주는 모습. 이처럼 뇌병변 장애인은 사소한 비장애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불편함과도 싸워야 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 4장. 심장은 뛰고 있었다 

배에 힘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는지, 의료진은 둘째를 ‘흡입분만기’로 끄집어냈다.

도구에 딸려나온 둘째는 검은빛이었다. 심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숨이 멎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했다. 손바닥만한 가슴을 으깨듯 짓눌렀다. 둘째의 심장이 간신히 뛰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둘째는 곧장 종합병원으로 이송됐다. 아빠가 응급차에 올라탔다. 오후 5시께, 산부인과에 남아있던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였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아기의 기도에 관이 삽입돼 있어. 몸에 연결된 줄만 10개가 넘어. 뇌를 다친 것 같대.”  

아기의 뇌는 죽은 상태였다. 숨을 쉬는 게 기적이었다. 친척들이 엄마에게 ‘둘째를 포기하자’고 말했던 이유였다. 엄마는 법석을 떨었다. 아픔을 헤아려주지 않는 친척들이 야속했다.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 됐을 때 윤재는 배에 관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식사, 간식, 물 등이 이 ‘배줄’을 통해 전달된다. 이를테면 생명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 됐을 때 윤재는 배에 관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식사, 간식, 물 등이 이 ‘배줄’을 통해 전달된다. 이를테면 생명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큰일, 사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발짝 옆에서 보면, ‘포기하자’는 말이 합리적일 수 있다. 엄마의 삶을 위한다면 그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일이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합리성의 기준이 달라진다. 엄마가 그랬다. 아기를 포기하는 건 용서받지 못할 죄罪이자 간악한 책임회피였다.  

엄마가 둘째를 처음 만난 건 그로부터 보름이 흐른 후였다. 몸도, 마음도 성치 않았지만 더 미룰 순 없었다. 마음을 간추리고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맑은 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3.2㎏, 달덩이같은 딸아이였다.  

엄마는 둘째의 귀에 속삭였다. “아기야, 네 이름은 윤재란다. 걱정 말거라. 엄마가 지켜줄게.” 윤재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엄마를 느낀 듯했다. 뇌는 죽었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윤재는 피부미인이에요”라면서 활짝 웃는 박주현 대표. 그는 “중환자실에서 윤재를 처음 만났을 때 달덩이처럼 하얗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윤재는 피부미인이에요”라면서 활짝 웃는 박주현 대표. 그는 “중환자실에서 윤재를 처음 만났을 때 달덩이처럼 하얗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5장. 기적 같은 일 

기적奇跡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뇌병변腦病變. 뇌성마비처럼 뇌문제로 나타나는 신체장애를 일컫는 말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거다. 뇌병변 장애인에게 옷을 입히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은 이유다. 돌처럼 뻣뻣해진 팔과 다리를 거세게 꺾어야 할 때도 많다. 옷을 입는 이에게도, 입히는 이에게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뇌병변·발달장애인 옷 전문업체 ‘베터베이직’의 박주현 대표. 그의 둘째딸(윤재)은 뇌병변 장애인이다. 돈과 시간을 들여 재활에 힘을 쏟았지만 윤재의 몸은 야속하게도 굳어만갔다. 먹는 것도, 앉는 것도, 하물며 옷 입는 것도 박 대표와 윤재에겐 괴로움이 됐다.  

박 대표는 ‘재봉틀’을 손수 돌렸다. 해외 장애인용 보디슈트를 참조해 앞을 터보고, 옆과 위를 뚫어봤다. 수술복 방식의 ‘트임옷’이었다. 간신히 입힌 옷이 허리춤으로 말려들지 않도록 아기자기한 ‘똑딱단추’도 달아봤다. 윤재에게 더 편하고 예쁜 옷을 입히기 위해서였다. 

샘플실에 넘긴 디자인 시안. 트임방식, 똑딱이단추 등의 시안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샘플실에 넘긴 디자인 시안. 트임방식, 똑딱이단추 등의 시안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눈물로 범벅된 날이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17년 박 대표는 ‘장애인옷 트임방식’으로 국내특허를 받았다. 같은해 열린 여성창업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선 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엔 국내 최초로 ‘장애인옷 표준규격’을 개발·발표했다.  

사람들은 “엄마가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면서 갈채를 보낸다. 박 대표는 수줍게 손사래를 친다. “주인공은 제가 아니에요. 윤재를 자식처럼 돌봐주신 선생님들, 장애인옷 표준규격을 만들 때 흔쾌히 도와준 장애아의 엄마들이 진짜 주인공이죠.”  

그래, 모든 건 기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희망이 싹튼 건 아니었다. 박 대표와 윤재에게 삶은 참 고약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윤재를 지켜주는 이는 엄마와 가족만이 아니다. 최춘화 활동보조선생님(가운데), 조현정 순회수업 담임선생님(오른쪽). [사진=오상민 작가]
“저 혼자만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윤재를 지켜주는 이는 엄마와 가족만이 아니다. 최춘화 활동보조선생님(가운데), 조현정 순회수업 담임선생님(오른쪽). [사진=오상민 작가]

# 6장. 목숨을 내건 수술  

보름 만에 엄마를 만난 윤재는 힘을 냈다. ‘퇴원 허락’이 떨어질 만큼 건강도 회복됐다. 2007년 10월, 엄마는 쌕쌕 숨을 쉬는 윤재를 안고 병원문을 나섰다. 중환자실에 온 지 50여일, 꿈에 그리던 퇴원이었다.  

하지만 낭만은 거기까지였다. 윤재와의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15~30분에 한번씩 가래를 뽑아내야 했다. 체내 산소포화도는 걸핏하면 위험수위로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몸이 달아올랐다 차가워졌다. 입에 삽입한 ‘관’으로 이유식을 넣으면 어김없이 역류했다. ‘죽은 뇌’가 근육을 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일들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진 엄마가, 새벽 3시부터 출근할 때까진 아빠가 윤재를 돌봤다. 한숨을 돌릴 틈조차 없었다. 삶은 고행苦行이었고, 고행은 일상을 무너뜨렸다. 윤재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유식이 자꾸 역류하면서 합병증에 시달렸다. 

윤재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시로 가래를 빼고, 산소포화도 등을 확인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온 윤재의 상태를 적어놓은 일지.[사진=오상민 작가]
윤재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시로 가래를 빼고, 산소포화도 등을 확인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온 윤재의 상태를 적어놓은 일지.[사진=오상민 작가]

윤재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집에 온 지 한달 만이었다. 이번엔 큰 수술을 받았다. 식도와 위장 사이에 있는 ‘근육’을 틀어막았다. 대신 입에 삽입했던 관을 빼고, 배를 뚫어 새로운 관을 넣었다. 합병증의 이유인 ‘역류’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은 숨가쁘게 진행됐다.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 된 윤재로선 ‘목숨을 내건’ 수술이었다. 엄마의 속은 숯처럼 탔다. “제발 눈만 떠다오. 눈만….” 그렇게 4시간, 집도의가 나왔다. “한고비를 넘겼네요. 단단한 아이입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눈물을 훔쳤다.  

# 7장. 엄마도 몰랐던 재능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다행히 역류는 사라졌다. 가래도 줄었다. 경기驚氣는 한결 누그러졌다. 어느덧 18개월, 윤재와의 삶은 익숙해졌다. 울고 웃고 성내고 토라지고…. 표현하는 방법만 다를 뿐 똑같은 아기였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응어리였다. 아빠는 아빠대로, 큰딸은 큰딸대로 ‘울화’를 삼키고 살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팽팽함이었다. 엄마가 나섰다. 아빠에겐 ‘댄스’를 권했다. 딸에겐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만 잘해라’고 조언했다.  

물리치료를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꺾인 관절을 펴고 트는 탓에 고통이 수반된다. 이 어려운 일을 윤재는 잘 해낸다. 단단한 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물리치료를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꺾인 관절을 펴고 트는 탓에 고통이 수반된다. 이 어려운 일을 윤재는 잘 해낸다. 단단한 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정작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일주일에 15~20회씩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오전‧오후 가리지 않았다. 욕심이었다. 아픔을 물려준 윤재에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죗값을 치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모든 걸 쏟아붓지 않으면 참담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우울이 쌓였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불면증이었다. 엄마도 ‘쉼’이 필요했다. “정말 우연이었어요. 장롱 속에서 퀼트(Quilt‧쿠션 등에 누비질을 해서 무늬를 만드는 것) 도구를 찾았죠. 윤재를 임신했을 때 종종 했던 거였어요. 퀼트를 하면 정신적 여유를 찾을 수 있겠구나 싶었죠.”  

윤재가 잠이 들면 엄마는 퀼트를 했다. 손지갑‧인형을 만들어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손재주가 일품이네”란 말을 들었다. 난생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엄마는 신이 났다. 내친김에 중고재봉틀을 마련해 수제가방도 만들었다. 눈썰미가 남달라서인지 원단도 척척 재단했다. 엄마도 몰랐던 재능이었다.

“윤재 덕분에 가족사진 찍네요.” 엄마와 아빠에게 윤재는 사랑스러운 딸이다. 언니에겐 귀여운 동생이다. 윤재는 가족에게 누구보다 사랑받는 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윤재 덕분에 가족사진 찍네요.” 엄마와 아빠에게 윤재는 사랑스러운 딸이다. 언니에겐 귀여운 동생이다. 윤재는 가족에게 누구보다 사랑받는 아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 8장. 엄마의 막연한 꿈  

“언니! 교수님이 뜻밖의 제안을 했어.” 엄마의 두살 터울 동생이 말했다.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언니가 만든 가방이 독특해 보였나봐. 플리마켓에 함께 나가자고 하더라고. 어때? 해보자.”  

1년 전인 2013년 봄. 엄마는 동생에게 수제가방을 선물했다. 재래시장에서 찾은 ‘독특한 원단(일명 펀칭데님)’으로 만든 것이었다. 동생은 그 가방을 1년 내내 메고 다녔는데, 교수가 우연찮게 그걸 본 모양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편’이었던 동생이었다. 윤재의 따뜻한 후견인이기도 했다. 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때마침 윤재도 ‘특수학교’에 입학해 짬이 생겼다.

엄마는 손가방‧지갑 등 30여개 제품을 손수 제작했다. 여기에 동생은 ‘비온뒤맑음’이란 브랜드를 붙였다. 첫번째 플리마켓에선 ‘완판’에 가까운 깜짝실적을 올렸다. 뒤이어 참가한 박람회에선 50여개 제품을 ‘완판’한 것도 모자라 상당한 양의 현장주문도 받았다. 엄마는 공업용 재봉틀을 부랴부랴 마련해 밤새워 작업했다. 현장주문 물량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박주현 대표는 집 한칸을 작업실로 꾸몄다. 윤재를 곁에 돌보며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사진=오상민 작가]
박주현 대표는 집 한칸을 작업실로 꾸몄다. 윤재를 곁에 돌보며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사진=오상민 작가]

고된 작업이었지만 일이 술술 풀렸다. 동생은 창업을 꿈꿨다. ‘비온뒤맑음’을 대중적인 패션브랜드로 키우길 원했다. 엄마는 달랐다. 장사는 자신 없었다. 손재주가 좋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혹여 창업을 하더라도 동생과는 ‘다른 결’을 원했다.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맞춤옷을 제작해보고 싶었다. 역설적이지만 윤재가 만들어준 꿈이었다. 

“윤재가 클수록 옷을 입히는 게 정말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윤재만의 옷’을 생각했죠. 먼저 몸통과 소매를 연결하는 부위를 넓게 만들어봤어요. 등·어깨·허리를 트는 방법도 시도했죠. 수없이 만들어보니 윤재에게 꼭 맞는 ‘트임방식’이 생기더라구요. 그때, 다른 뇌병변 장애인에게도 이런 패턴의 옷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죠. 막연한 상상이었어요(웃음).” 

엄마의 상상, 덧없는 봄꿈이 아니었다. 그 꿈은 엄마도 모르게 진해지고 있었다.  

물리치료를 받은 다음 산책 중인 박주현 대표와 활동보조선생님, 그리고 윤재. 밝은 햇살이 윤재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물리치료를 받은 다음 산책 중인 박주현 대표와 활동보조선생님, 그리고 윤재. 밝은 햇살이 윤재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9장. 윤재가 보낸 신호  

동생은 계획대로 ‘비온뒤맑음’을 론칭했다. 엄마는 천천히 계단을 밟기로 했다. “동생에겐 손지갑 등 수제제품만 만들어주기로 했어요. 저는 ‘뇌병변 장애인 옷’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죠.”  

2015년 4월 엄마는 서울시·한국패션협회가 주관한 ‘창업보육과정’에 들어갔다. 창업실무를 깨치는 게 목적이었지만 윤재만을 위해 만든 옷을 검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엄마는 실무과제로 ‘트임방식의 장애인 옷’을 냈고,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창업보육과정의 멘토는 엄마의 도전을 눈여겨봤다. “아이템이 독특하네요. 특허출원을 해보세요. 결실이 있을 것 같아요.”  

엄마에겐 꿈같은 소리로 들렸지만 그게 아니었다. 엄마만의 ‘트임방식’은 실제로 특허출원됐다(2015년 9월). 이를 계기로 엄마는 옷 만드는 방법도 정식으로 공부했다. 아픈 아이들의 옷을 얼기설기 만들고 싶지 않았다. 

2015년 10월부터 작은 수선집에 출근해 ‘패턴 만드는 법’ ‘단 줄이는 법’ 등을 배웠다(중부여성발전센터 의류수선반 과정).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겨울코트를 뚝딱 만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옷 수선 솜씨도 매끄러워졌다.

박주현 대표는 새 원단을 시장에서 찾는다. 봄·여름시즌을 맞아 원단을 보고 있는 박 대표.[사진=오상민 작가]
박주현 대표는 새 원단을 시장에서 찾는다. 봄·여름시즌을 맞아 원단을 보고 있는 박 대표.[사진=오상민 작가]

엄마는 눈코 틀 새 없이 바빠졌다. 수선일뿐만 아니라 동생이 의뢰하는 일감도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윤재의 몸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2015년 12월, 수선실에서 재단작업에 열중하던 엄마의 휴대전화가 숨가쁘게 울렸다. 윤재 선생님의 전화였다. “윤재가 불덩이에요, 불덩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엄마의 몸도 떨려왔다.  

# 10장. 윤재가 던진 숙제  

독한 열이 윤재의 몸을 휘감았다. 체온이 40도를 넘나들었다. 해열제도 통하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부터 윤재의 몸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옷을 입히기 위해 팔을 말면 자지러졌다. 다리를 접으면 비명을 질러댔다. 여태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진찰을 받아보니, 당황스러운 답이 되돌아왔다. “관절이 빠졌습니다.” 

윤재의 관절은 헐겁게 매달려 있다. 윤재를 옮길 때 최소 두명 이상이 들어줘야 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윤재의 관절은 헐겁게 매달려 있다. 윤재를 옮길 때 최소 두명 이상이 들어줘야 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탈구脫臼. 윤재처럼 사지가 마비된 뇌병변 장애인에게 흔히 찾아오는 병이다. 몸을 쓸 수 없어 누워지낼 수밖에 없는 뇌병변 장애인은 관절이 풀려있는 경우가 많다. 몸이 중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서다.

윤재가 그런 사례였다. 뼈에서 빠진 관절이 신경을 건드려 격하게 몸부림을 쳤던 거다. 수술도 어려웠다. 관절이 헐겁게 매달려 있는 탓에 재발확률이 높았다. 

엄마는 ‘엄마의 일’을 멈췄다. 제작이든, 수선이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저귀 가는 법, 옷 입히는 법 등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먼저였다.  

엄마는 이를 ‘윤재가 내준 숙제’라고 말했다. “윤재는 계속해서 제게 숙제를 내요. 전 그걸 풀면서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죠. 사실 그땐 좀 두려웠어요. 일이 순식간에 늘어서 ‘이래도 되나’ 싶었죠.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죠.” 

고관절이 탈구된 이후 윤재는 학교에 가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선생님이 찾아오는 순회수업을 받는다.[사진=오상민 작가]
고관절이 탈구된 이후 윤재는 학교에 가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선생님이 찾아오는 순회수업을 받는다.[사진=오상민 작가]

# 11장. 딸이 말없이 건넨 선물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철학자 니체-  

“미안해, 수제제품은 더 못 만들겠어.” 옷을 수선하고 배우는 일을 빼곤 모두 접었다. 동생에겐 ‘미안함’을 전했다. 수제제품까지 일일이 만드는 건 무리였다. 엄마는 여유를 조금씩 되찾았다. 관절이 빠진 윤재를 위해 바꾼 삶도 안정돼 갔다.  

그런 엄마에게 ‘놀랄 만한 일’이 찾아온 건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후였다. 2년 전 출원됐던 ‘장애인옷 트임방식’이 특허로 등록됐다(2017년 5월). 사회적기업진흥원은 창업자금을 마련해주겠다고 나섰다. 운명이란 녀석이 돌고돌아 엄마를 찾아온 셈이었다. 

엄마는 피하지 않았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뇌병변·발달장애인 옷 전문업체 ‘베터베이직’을 창업했다. ‘뇌병변 장애인 옷’의 표준규격을 만드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비장애인 옷에 빗대면 스몰(S)·라지(L) 등 표준규격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정부도 엄두를 못낸 일이었지만 엄마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장애아이를 둔 엄마들(윤재가 다니는 특수학교의 학부모)이었다.  

2018년 3월부터 엄마는 시제품을 만들어 엄마들에게 나눠줬다. 자랄수록 체형이 변하는 장애인의 표준규격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입혀보고, 수정했다. 그렇게 5개월여, 엄마들은 장애인의 키로 분류한 ‘6가지 표준규격(115~165㎝)’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박주현 대표가 창업한 베터베이직은 국내 최초 뇌병변·발달장애인을 위한 의류 브랜드다.[사진=오상민 작가]
박주현 대표가 창업한 베터베이직은 국내 최초 뇌병변·발달장애인을 위한 의류 브랜드다.[사진=오상민 작가]

베터베이직은 현재 브라톱 보디슈트, 앞트임 롬퍼 등 10여종의 장애인 전문의류를 판매하고 있다. 뇌병변·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론 앞트임·옆트임 등 수선서비스도 제공한다. 
  
최근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옷으로 허물기 위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이른바 ‘유니버설 옷’ 프로젝트인데, 뇌병변 장애인의 턱받이가 비장애인에겐 머플러가 되는 식이다. 원피스·레깅스 등 출시한 ‘유니버설’ 제품도 여럿이다. 
 
그렇다고 난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일반의류보다 길이가 약간 긴 장애인 전문옷을 낯설어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소량생산을 꺼리는 업체도 수두룩하다. 장애인 전문의류만으로 판로를 넓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엄마는 “창업 초기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산이 많다”면서도 “장애인 전문의류를 비장애인도 입을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들어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다’는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작은 목표를 털어놨다.   

숱한 눈물과 곡절에도 박주현 대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윤재뿐만 아니라 뇌병변 장애인을 위해 하루를 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숱한 눈물과 곡절에도 박주현 대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윤재뿐만 아니라 뇌병변 장애인을 위해 하루를 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떤 이는 “엄마의 재능이 뒤늦게 꽃폈다”고 평한다.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옷을 만들고, 다름의 참된 가치를 전달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헌신”이라고 치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엄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윤재가 없었다면 아무런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저만의 능력이 절대 아니에요.” 엄마가 빙긋 웃었다. 윤재도 말없이 눈을 맞췄다. 뇌가 아픈 딸이 엄마에게 건넨 선물, 그건 기적이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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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2019-05-20 15:12:05
아 ㅠㅠ 눈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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