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즈시대의 함의

‘패션은 발끝에서 완성된다’는 말은 옛말이 됐다. 패션이 발끝에서 시작하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휠라코리아의 부활이나, 날개돋힌 듯 팔리는 신발의 인기만 봐도 그렇다. 잘 만든 신발 한 켤레가 브랜드를 살리고, 제2의 전성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패션업계가 SPA브랜드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트렌드는 이례적이다. SPA브랜드는 왜 신발을 움켜쥐지 못했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슈즈시대의 함의를 취재했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신발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신발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휠라’가 재기했다. 비결은 흥미롭게도 운동화 ‘디스럽터2’가 인기를 끈 덕분이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인기를 끈 이 제품은 2017년 7월 국내에 출시됐다. 이후 올해 3월까지 220만족이 팔려나가면서 휠라의 부활에 불을 지폈다.

2007년 글로벌 사업권을 인수하고도, 실적이 지지부진했던 휠라코리아는 매출액 3조원을 코앞에 두고 있다. 2016년 9671억원이던 매출액은 지난해 2조9546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18억원에서 3571억원으로 증가했다. 휠라코리아 관계자는 “1997년 처음 출시됐던 디스럽터가 뉴트로(New+Retro) 트렌드와 어글리슈즈 열풍 등과 맞물리면서 해외시장에서부터 다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신발 덕을 본 건 휠라뿐만이 아니다. 명품 브랜드들도 신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발렌시아가다. 발렌시아가는 2017년 ‘어글리슈즈’라 불리는 ‘트리플S’와 ‘삭스슈즈’라 불리는 ‘스피드러너’를 출시했다. [※참고: 어글리슈즈는 투박하고 못생긴 디자인이 특징이다. 삭스슈즈는 양말을 신은 듯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발렌시아가는 기존 구두류가 주를 이루던 명품 브랜드 사이에서 캐주얼 신발로 붐을 일으켰다. 이들 제품이 인기를 끌자,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잇따라 뛰어들었다. 2018년엔 구찌 ‘라이톤’, 샤넬 ‘트레이너’, 루이비통 ‘아치라이트’ 등이 출시됐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신발은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발렌시아가의 트리플S의 경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현대백화점에선 올해(1월 1일~5월 21일) 프리미엄 운동화(50만원 이상)의 매출 신장률이 38.4%(전년 동기 대비)를 기록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골든구스 슈퍼스타, 발렌시아가 트리플S 등 스테디셀러의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면서 “일반 스니커즈 상품 소진율이 50~60%에 그치는 반면, 프리미엄 스니커즈 제품은 물량을 전년 대비 30%가량 확충했음에도 재고 소진율이 8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은 명품 신발이 인기를 끌자, 전용 편집숍까지 오픈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3일 분당점 1층 탑스 매장 내에 골든구스ㆍ구찌ㆍ발렌시아가ㆍ발렌티노 등의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숍 ‘에디뜨’를 열었다. 회사 관계자는 “에디뜨는 26㎡(약 8평) 남짓의 작은 매장이지만, 일평균 400여명이 다녀갈 만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명품 신발에 손을 뻗치는 젊은층이 증가하면서, 20~30대의 명품 매출 비중도 껑충 뛰었다. 현대백화점에선 지난해 20대 명품 매출 신장률이 28.5%(이하 전년 대비)를 기록했고, 갤러리아백화점에선 20~30대 명품 매출 신장률이 15%를 찍었다.

바야흐로 슈즈시대다. 한짝의 신발이 브랜드를 살리고, 전성기를 이끈다. 흥미로운 점은 슈즈시대를 명품 브랜드가 주도한다는 점이다. 패션업계가 ‘가성비’를 앞세운 SPA 브랜드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의류시장을 ‘꿀꺽’하고 있는 SPA브랜드는 왜 신발을 손아귀에 넣지 못했을까. 첫째 이유는 신발의 기능성이 옷에 비해 훨씬 중요해서다. 착화감ㆍ내구성ㆍ안정성ㆍ유연성 등 기능성이 신발에 필수인 만큼 저가 브랜드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거다. 허제나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SPA브랜드의 성장이 의류업계에 위협 요인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신발업계에서는 SPA브랜드가 뚜렷하게 성공한 사례가 없다”면서 “편안한 신발에 제값을 지불하는 소비행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둘째 이유는 신발을 바라보는 젊은층의 인식이다. 수십만원 하는 티셔츠를 사기엔 돈이 아깝고, 수백만~수천만원 하는 가방을 구입하기엔 부담스러운 젊은층 가운데 신발은 ‘살 만한 명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유정현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신발은 가방보다 저렴한 가격에 명품 브랜드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매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심리학) 교수는 “신발은 계절에 구분 없이 자주 신을 수 있고, 남녀 구분이 크지 않다”면서 “옷이나 가방 대비 활용도가 높은 품목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셋째 이유는 브랜드가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곽 교수는 “신발은 로고나 디자인으로 브랜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사람들의 과시욕을 쉽게 충족시켜줄 수 있다”면서 “아울러 기업으로서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알리기에 좋은 아이템이다”고 말했다. 사실 슈즈시대가 기업에 시사하는 점은 또 있다. 제아무리 불황이더라도 소비자가 ‘가성비’만 좇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소비자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한 서비스나 제품이라면, 불황에도 소비자의 지갑은 열린다. 한짝 신발의 실례實例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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