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배심제와 부정부패

요새 우리 국민들은 TV만 틀면 어지럽다. 권력층의 부패와 부정을 다룬 뉴스가 끊이질 않아서다. 처음엔 불을 켜고 추이를 지켜보지만, 이내 관심이 식는다. 사건의 진실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당사자인 가해자들은 입을 다물기 일쑤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은 권력의 진짜 주인인 우리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일반 국민이 중범죄자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미국의 대배심제 도입 논의를 본격화하자는 거다. 더스쿠프(The SCOOP)의 창문窓門, 대배심제와 부정부패의 상관관계를 짚어봤다. 김의철 네이처인터내셔널 상무가 진행하는 새 시리즈다. 

유명 연예인이 연루된 버닝썬 사태에선 수사기관이 범죄를 비호한 정황들이 보인다.[사진=뉴시스]
유명 연예인이 연루된 버닝썬 사태에선 수사기관이 범죄를 비호한 정황들이 보인다.[사진=뉴시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사회 고위층이 여론을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대사처럼 대중은 생각 없는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패한 한국 사회의 민낯을 마주할 때마다 경악한다. 정도가 심할 땐 1000만명의 시민이 광장에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대중의 관심이 식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숱한 의혹이 실체적인 진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드문 탓으로 추정한다. 최근엔 정상급 아이돌 등 인기 연예인들의 마약ㆍ성ㆍ뇌물 스캔들인 ‘버닝썬’ 사건이 시끄럽다. 하지만 공공연한 의혹에도 무엇이 어떻게 규명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때 법무장관 후보까지 올랐던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성폭행 의혹도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진 않았다.

한 여배우가 성접대를 강요받은 사실을 폭로하며 목숨까지 끊었지만, 우리가 이 사건을 두고 알고 있는 게 많지 않다. 5년 전 전국민을 눈물짓게 했던 세월호 참사의 진실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대중적 호기심과 분노를 자극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들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니다. 사회 고위층의 민낯이 제대로 드러나야 우리 사회의 투명도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공권력이 그간 고위층을 비호하고 있었다면, 호되게 꾸짖어야 하고 공권력의 진짜 주인이 국민이라는 걸 되새겨줘야 한다.

문제는 미디어의 힘만으로는 그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언론은 수사권ㆍ기소권도 없고, 재판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사법권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법원, 검경에 기대는 건 더 순진한 일이다. 이들의 낯 뜨거운 행각과 비리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런 사건이 외국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프랑스에선 감사원이 팔을 걷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감사원은 헌법에 기초한 헌법기관으로서 입법, 행정, 사법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관이다. 시민혁명 이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탱해온 곳이기도 하다.

감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 그랑제콜 내에서도 상위 10% 안에 들어야 한다. 들어가면 판사의 자격을 갖게 되고 종신직으로 근무한다. 수사권과 기소권도 갖고 있다. 막강한 권력에도 국민들의 견제 대신 지지를 받는다. 

국민들이 감사원의 높은 자긍심과 역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감사원은 이런 신뢰에 부족함 없이 부응해 왔다. ‘버닝썬 사태’와 같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의혹을 눈뜨고 지켜볼 가능성은 낮다.

버닝썬 수사 결과 규탄

미국엔 유명한 대배심제도가 있다. 무작위로 뽑힌 16~23명의 일반 국민들이 중범죄 피의자의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이들 역시 증인 소환과 자료제출 강제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검찰에서 파견된 검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검사가 마땅치 않으면 교체를 요구할 수도 있다. 대배심 제도의 타깃은 제한이 없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와 권력기관이 대상이다.

현재 배심원 제도는 영미권 약 50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일본ㆍ홍콩ㆍ스리랑카 같은 나라들이 시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 배심제도가 보편화돼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배심제의 뿌리는 깊다.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배심제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 국민 중에서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해 유ㆍ무죄 및 기소 여부를 심판했다. 당시엔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진 중세시대 왕이나 영주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려는 제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국가들이 이를 도입한 목적은 다르다. 국민의 건전한 상식에 맞는 재판을 하자는 게 취지다.

배심제도 종류가 여럿이다. 배심원이 일종의 판사 역할을 하면서 사실을 조사하고, 심판을 내리는 배심을 ‘소배심’이라고 부른다. 배심원이 사실상 검사 역할을 하면서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배심은 앞서 언급했던 미국의 ‘대배심’이다. 국민이 재판절차에 참여하는 방식 중에는 ‘참심제’도 있다. 형사재판에 한정해 일반 시민 중에서 발탁된 참심원과 직업 판사가 함께 평의를 실시해 사실인정 및 양형판단을 하는 제도다.

한국에선 ‘소배심제’와 ‘참심제’를 혼용한 ‘국민참여재판’을 2008년부터 시행 중이다. 그런데 문제점이 뚜렷하다. 일단 대상이 협소하다. 살인ㆍ강도ㆍ강간 등 중범죄사건만 다룬다. 민사재판엔 도입되지 않는다. 배심원단의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평결하지만, 권고적 효력만 갖는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얘기다.

국민참여재판의 한계

필자는 이런 점에서 한국에도 미국의 대배심제 도입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제도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일반인은 법리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쉽고 배심원의 구성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 주권자를 배신한 헌법위기의 상황이다. 기득권층의 지저분하고 한심한 작태에 국민들은 집단 트라우마에 걸리기 일보직전이다. 본래 국민의 것인 사법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일반 국민들이 기소 여부에 관여하게 하고, 국민들의 유무죄 평결에 법원이 따라야 하는 세상이 온다면? 기득권층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을 명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의철 네이처인터내셔널 상무 dosin4746@natureincorp.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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