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편 승전 전략❶

이순신은 전사한 38명의 이름을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두 장계에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은 전사한 38명의 이름을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두 장계에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불패의 명장 이순신

이순신이 직접 해전에 참여해 출동한 것은 16회였습니다. 한번 출동해서 한번만 전투를 한 적도 있고, 두번 이상의 전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23전 23승’을 했는지, 아니면 ‘30전 30승’을 했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쨌든 이순신은 임진왜란 동안 열여섯번 출동해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패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도, 적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반면 원균이 당한 단 한번의 패배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칠천량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의 전부였던 256척의 군함이 침몰하고, 34척이 유실된 것입니다.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기간에 세운 전공은 8척의 일본 배를 불태운 것뿐이었습니다. 굳이 이순신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업적이었습니다. 

이순신의 심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든 백의종군 이전의 기록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이순신은 임진년 1592년 4월부터 삼도수군 통제사의 직책을 잃고 감옥에 투옥되던 정유년 1596년 2월까지 320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는 통선 2척에 불과했습니다. 그 2척의 통선도 아군의 지휘 실수로 서로 부딪혀서 유실됐으므로, 사실상 단 한척의 피해도 없었던 셈입니다. 

왜군의 인명 피해가 1만명을 넘을 때, 조선군의 피해는 사망 38명, 부상 139명뿐이었습니다. 전사한 38명의 이름은 선조에게 올린 이순신의 장계에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 38명의 이름은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등병 이름 다음에 대령 이름이 나오고, 하사 이름 다음에 주임원사 이름이 나오는 식입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봐도 놀라운데, 당시가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율포해전 후에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사망자를 거론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적과 맞붙어 싸울 때 군졸로서 화살과 총알을 맞은 사람 중에 신이 타고 있던 배의 정병인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군인 진무 장언기, 순천 제1선의 사부射夫배귀실, 제2선의 격군인 사노 막대, 보자기 내은석, 보성 제1선의 사부인 관아의 종 기이, 흥양 제1선의 화살 제조 기술자인 관아의 종 난성,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장희달, 여도 사공인 지방병사 박고산, 격군인 박궁산 등이 총알에 맞아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전과를 올리는 건 동서양의 전쟁 지휘관들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이룬 명장은 세계적으로도 몇명 되지 않습니다.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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