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노미네이션, 그 무의미한 논쟁

화폐단위 변경을 의미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향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과 정부가 진화에 나서고 있음에도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측은 국내 통화의 지위 향상, 인플레이션을 통한 경기부양 효과 등을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이 화폐개혁을 할 때인가라는 원론적인 반론도 많다. 화폐단위의 공(0)을 빼는 데 집착할 때가 아니라는 거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리디노미네이션을 둘러싼 논란을 취재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사진=뉴시스]
리디노미네이션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사진=뉴시스]

1, 10, 100, 1000, 1만, 10만, 100만…. 가격을 확인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속으로 헤아리는 화폐의 단위다. 이를 두고 사용하는 단위가 지나치게 높아 불편하다는 말이 나온다. 최근 금융시장은 물론 정치계에서도 ‘핫이슈’로 떠오른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Redenomination)’ 논란이다.

일례를 보자. 1경3817조5000억원(13,817 ,500,000,000,000원)은 2017년 국민대차대조표 기준 우리나라의 순자산 규모다. 5000억원까지 붙는 0만 11개에 이르기 때문에 금액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사용자의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화폐 단위를 변경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폐부터 외환·채권·가격·기업회계·은행 ATM(현금자동입출금기) 등 돈과 관련된 건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변화가 발생하는 만큼 장단점도 명확하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두고 찬반양론이 격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하나씩 살펴보자.

■ 시행 가능성 있나 = 우선 리디노미네이션의 시행 가능성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능성은 낮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논란 이후 3차례에 걸쳐 “리디노미네이션을 검토한 적도 없고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월 23일 “리디노미네이션은 지금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며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전문가들도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시행 가능성은 낮게 봤다. 경기가 신통치 않은 상황에서 통화 단위를 변경해 시장에 혼란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리디노미네이션의 장단점 =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전문가는 많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장점으로 언급되는 경제활동의 편의성 제고, 지하자금의 양성화, 인플레이션·관련 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경기부양 효과, 통화의 국제적 지위 격상 등의 효과를 노릴 수 있어서다.

문제는 효과의 불확실성이다. 화폐단위에서 불필요한 0을 없애면 계산을 하거나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걸 제외하면 이렇다 할 효과가 없다. 이는 리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도 해소할 수 있는 문제다. 스타벅스가 2014년부터 제품의 가격을 4100원(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기준)이 아닌 4.1로 표기하고 있는 건 대표적이다. 신용카드·간편결제 등 결제수단 다양화의 영향으로 현금거래가 적어 실익이 크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 지하자금 양성화될까 = 지하자금의 양성화 효과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지하자금의 양성화를 목표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경우 사회적 반발에 막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리디노미네이션 과정에서 신권으로 교환된 지하자금이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가면 지하자금의 양성화를 달성할 수 없다. 밖으로 나온 지하자금에 강제예금 등의 규제를 하지 않는 이상 지하자금의 양성화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 경기부양 효과 있나 = 인플레이션·산업활성화를 통한 경기부양 효과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의 경기부양 효과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1000대 1로 화폐 단위가 변경돼 4900원인 상품의 가격을 4.9원으로 바뀌면 소비자가 상품의 가격이 내려갔다고 착각해 소비를 늘린다는 것이다.

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리디노미네이션이 이뤄지더라도 소비에 필요한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착시효과가 길게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이는 지난해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에서 발표한 ‘리디노미네이션을 이용한 가격표기 방식이 소비금액에 미치는 영향(김혜원 성대(경영대학원) 석사·이석규 성대(경영대학원) 교수)’ 논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논문에 따르면 리디노미네이션을 이용한 가격표기 방식으로 발생하는 소비증가 효과는 상품의 가격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확한 계산이 가능해질수록 줄어들었다. 소비자가 초기에는 가격이 싸졌다고 착각하지만 표기방식에 익숙해질수록 효과가 감소했다는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소비증가 효과가 단기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반대로 리디노미네이션은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더 많다. 기업이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에서 소수점 이하 금액을 인상할 공산이 커서다. 4900원이었던 제품의 가격이 리디노미네이션 과정에서 4.9원이 아닌 5원으로 변경돼 물가만 상승할 수 있다는 의미다.

■ 화폐 단위는 국격인가 = 관련 산업 양성화에 따른 경기활성화, 통화의 국제적 지위 상승효과도 불확실하긴 마찬가지다. 2004년 한국은행은 리디노미네이션에 2조6000억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예측했다. 이를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고 그동안의 물가상승률을 더하면 5조~10조원 안팎의 자금이 리디노미네이션에 투입될 전망이다. 시장에선 이보다 큰 20조원의 편익이 발생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망에 불과하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드는 돈은 정부가 추진 중인 추가경정 예산(10조원)과 맞먹지만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김상봉 한성대(경영학)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에 드는 비용은 확실한데 편익은 불분명하다”며 “경제도 부진한데 통화·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만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화폐의 단위가 나라의 국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며 “국격은 화폐에 붙은 0의 숫자가 아닌 실질적인 경제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부동산 가격상승 부추길까 = 리디노미네이션이 부동산 등 실물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통화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믿을 수 있는 건 실물자산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국내 큰손들이 금과 부동산을 사 모으는 데 혈안이 돼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권대중 명지대(부동산학과)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부동산이 주목받는 건 가격이 화폐 단위 변경으로 가격이 싸졌다는 착시효과보다 실물자산이 안전하다는 인식이 커지기 때문이다”며 “시중의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때아닌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에 시장이 뜨겁다. 하지만 대다수 경제전문가의 말처럼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을 따져야 할 시점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화폐 단위의 변경보다 경기둔화, 무역전쟁 격화, 실업률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숱해서다. 화폐에 붙은 0을 빼는 것은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를 살릴 방법을 찾은 뒤에 시행해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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