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편 해전 ❸

이순신은 병사들이 최대한 굶지 않도록 군대를 운용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은 병사들이 최대한 굶지 않도록 군대를 운용했다. [사진=연합뉴스]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병작하게 하고 관에서는 그 반만 거두어들여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돌산도에 있는 국가 소유의 둔전은 묵은 지 벌써 오래된 곳인데, 그곳을 경작해 군량에 보태야겠다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 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 경작시켜서 토질을 시험해 봤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正租로 5백 섬이나 됐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 창고에 들여놨습니다. - [청설둔전장 1593. 윤 11.17]

앞의 글은 둔전 설치를 청하는 장계狀啓입니다. 장계는 조선시대에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가 조정과 왕에 바치는 보고서입니다. 이순신이 열악함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것들도 이순신의 지휘 하에서는 모두 활용 가능한 자원이 됐습니다.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임진왜란 시기, 많은 백성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습니다. 부모가 굶어 죽은 자식을 잡아먹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병사들이 최대한 굶주리지 않도록 군대를 운용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국가가 백성들에게 땅을 경작하게 할 경우, 약 절반을 토지 임대료로 받았다는 사실도 이순신의 장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매우 구체적이고 꼼꼼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숫자에 능했습니다. 타고났을 수도 있지만, 국가 재산에 대한 책임감과 유교적 현실주의가 더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는 유학에 능했지만 물질의 중요성도 철저하게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26일 기유. 큰비가 오고 남풍이 세게 불었다. … 순천의 군량 150섬 9말을 받아 의능의 배에 실었다. 

초2일 신미. 맑음. 새벽에 지휘선을 출항시켰다.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이고 끌어내리게 했다. 충청 수사, 우수사, 경상 수사와 두 조방장이 함께 와서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26일 계유. 비가 계속 내렸다. 오수가 청어 1310두름을, 박춘양은 787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202두름을 바쳤다. 

22일 을사 맑음. 전선을 만들기 위해 자귀질을 시작했는데, 목수가 214명이다. 물건 나르는 사람은 본영에서 72명, 방답에서 35명, 사도에서 25명, 녹도에서 15명, 발포에서 12명, 여도에서 15명, 순천에서 10명, 낙안에서 5명, 흥양과 보선에서 각 10명이었다.
- 「난중일기」

그의 꼼꼼한 성격은 위의 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특히 을미년에 쓴 일기를 읽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라면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000여명에게 밥을 먹이고…” 라고 썼을 겁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라고 썼습니다.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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