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5회 ①

이순신이 특별히 괴이한 군함을 만드니 그 형상이 거북과 같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이 장철갑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괴상하고 불편해 보이는 배를 만들어 무엇하냐며 비평과 냉소를 쏟아냈다.

 
좌수영 수군 장졸의 총명칭은 대솔군관1) 이하로 비장裨將, 영교營校, 영리營吏, 진무鎭撫, 별무사別武士, 성장城長, 주사화포수舟師火砲手, 타공舵工, 능노군能櫓軍, 마도사령馬徒使令, 군뢰軍牢, 별기대別旗隊, 취고수吹鼓手, 차패莗牌, 관노官奴, 통인通引, 궁인弓人, 시인矢人, 선장船匠, 야장冶匠, 혁공革工, 칠공漆工, 도창수刀槍手, 은금세공銀金細工, 선자扇子, 목수木手, 골각공骨角工, 등등이었다.
이들 18반 12장색을 합하여 군졸의 총수가 1800이었다. 그 중에도 건장한 자는 그 반수에도 못 미치고 그 나머지는 노약자이며 또는 군적에 이름만 있을 뿐 사람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순신은 관하 각 관포에 장정 및 기술자를 선발하여 병력을 크게 확장하여 3배 이상으로 증가하고 훈련하고 보살피며 충의와 신의로 위주하니 군대의 질서도 차차로 진취 감화되어 나라를 위해 죽기로 싸울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순신이 특별히 괴이한 군함을 만드니 그 형상이 거북과 같다. 이배는 세계 최초의 장갑철선이었다. 그를 새로 발명해낸 사람은 곧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세계 철갑선의 원조가 되는 사람이다. 순신이 몸소 도편수 격으로 되어 조성한 군함이었다.
붉은 소매를 단 남천익2)을 입고 청전대3) 매고 은정자4) 홍상모5)와 호수 공작미6)에, 황호박 산호주로 만든 갓끈을 단 양전립7)을 쓴 장수, 신장은 팔척이요 호랑이 눈썹 봉황 눈이며 제비 턱 용 수염이며 푸짐한 코에 큰 귀의 장수가 서애 유성룡의 역천함을 인하여 새로 좌수사가 된 백암 이순신이었다.

이 거북선을 지을 때에 보고 듣는 사람들은 새 수사 이순신의 계획에 의혹의 마음을 일으켜 물에 익숙하고 배에 익숙하다는 사람들이 뒷구멍으로 비평하기를 새 수사의 어리석은 계획을 냉소한다. “만고 역대에 저러한 병선은 처음 본다. 병선이라면 대맹선 중맹선 등이지, 저러한 괴형이고도 불편한 배는 건조하여서 무엇하느냐”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이었다. 수사의 아장亞將인 우후8) 김운규金雲珪 까지도 말하기를 “경험 없는 새 수사의 터무니없는 장난질”이라고 비평한다.

 
“만일 새로 짓는 거북선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비밀히 자기와 친분 있는 병판에게 보고라도 해서 새 수사가 파직 당하는 모양을 보리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수사는 공무만 마치고 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 짓는 감독을 한다. 그때에 배 만드는 도편수 한대선韓大善은 순신의 지시를 받아 유일한 심복이며 동지자라 할 것이요 그밖에 수사의 병선 대혁신의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녹도만호 정운鄭運이었다.
송희립은 순천부 사람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고 담력과 지혜와 용기가 과인하고 의기가 있는 남아이다. 새 수사가 선택하여 대솔군관을 삼았다.

녹도만호 정운도 강관9)의 재략을 품은 상당한 용장이다. 일찍이 고을의 수령이 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전 녹도만호 이대원이 전사한 뒤로는 조정에서 녹도를 중시하여 정운 같은 장재를 택하여 녹도만호에 임명한 것이다. 참으로 충성스럽고 용맹하고 개결介潔한 장사이다. 순신이 관하 각진을 순시할 때에 녹도의 병선 군기 군제가 모두 가지런한 것을 보고 눈에 띄게 된 것이었다. 이때에 위로 정승 판서로부터 외방의 수령 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부패하였다.

전조선 4만 8800여인의 수군과 5960여인의 조졸10)이며 850여척의 병선이라고 하여도 명색뿐인 중에 정운 같은 장수를 만난 것은 실로 영웅제회英雄際會라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묘1591년 4월 모일에 조선의 철갑선 다시 말하면 세계 최초의 철갑선 즉 거북선이 직공들이 주야로 일함으로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진수되어 나뜨는 날이었다. 전고에도 보지 못한 거북선이란 것이 물에 나뜨는 것을 보자고 좌수영 백성들은 물론이고 인근 각읍 각포에서도 구경을 하려고 모여들어서 좌수영에는 수만명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새로 지은 산덩이 같은 거북선에는 이물[선수] 고물[선미] 노뒤[좌현] 노앞[우현]할 것 없이 오색 기치를 달아서 바람에 나부꼈다. 조선소 위에 있는 복파정伏波亭에는 수사, 우후, 조방장, 각읍 수령, 각진 변장, 대솔군관들이 각기 군복 전립에 환도 전통 궁고11)를 갖추어 메고 열석列席하였다.

복파정 아래에는 수천명 수군과 수백명 조졸이 행렬을 지어 벌여 서고 군항 내에는 판옥대맹선 협판중맹선 소맹선과 종선12) 사후선13)과 비정14) 엽사15)가 늘어서 정박되어 있고 각읍 각관포의 수령 변장들이 타고 온 병선을 합하여 대선이 30여척이나 되는 배가 무더기를 지어 떼떼이 떠 있다. 좌수영에 속한 5읍 6진의 군함들도 새 수사의 엄숙한 지휘로 거의 정돈되었다. 그 중에도 녹도 병선들은 지난번 전쟁의 경험으로 그 쾌속하고 정예한 모습이 좌수영 병선에 비교한대도 별로 손색이 없었다.

때마침 조수가 밀려 왔다. 큰 북소리가 울리자 아단단지16)가 터지고 그 속으로 무수한 화전火箭이 나와서 공중에 살별17) 흐르듯 날았다. 이 화전도 새 수사가 강렬하게 개량한 것이니 이것으로써 적의 간담을 놀라게 하고 적선에 불을 놓자는 것이다. 이 아단단지의 별명은 대발화大發火라고 한다. 즉 지금의 폭발탄과 같은 것이었다. 이 아단단지의 소리를 군호로 수천명 수군이 줄을 끌어서 산덩이 같은 거북선이 바다 위로 나갔다.

배가 진수한 뒤에 군악이 일어나고 뭇 배 만든 일꾼들이 춤추기 시작하여서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 군악이 그친 뒤에 우후 김운규가 널빤지를 밟고 거북선으로 올라갔다. 수사와 제장이 다 배에 오르고 160명 거북선의 수군 조졸이 다 올랐다. 대맹선에 군사 80~90명 많아야 100이고, 중맹선에 군사 60~70명, 소맹선에 군사 30~40명인데 이 거북선에는 선장 이외에 군사가 160명이었다.

그 중에 40명은 노를 젓되 20명씩 양편으로 갈라서 번갈아 노를 젓고 72명은 귀선의 72 포혈[즉 천•지•현자 총통銃筒을 배치한 곳]에 한 구멍씩 맡고 36명은 포수의 번을 갈아드는 사람이요 나머지 12명은 거북 머리 안에 불을 놓아 거북의 입으로 독한 연기를 토하게 하는 책임과 취사와 청소를 맡아 하는 군사였다. 천자총통의 중량은 정철 200근이요 지자총통의 중량은 정철 150근이요 현자총통의 중량은 정철 50근이던 것이었다.

이윽고 거북선의 아가리에서 산과 바다를 진동하는 큰소리가 오호호 하는 길고도 흉물스러운 소리가 나며 그 뒤를 이어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또 그 뒤를 이어서 대완구大碗口의 대포 소리와 함께 화광이 충천하며 무수한 화전이 살별같이 바다 하늘로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좌우 양편에 걸린 20개의 노가 일시에 물을 당기니 크나큰 거북선이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며 살같이 바다로 내달았다.
좌수영 앞바다를 몇 바퀴 돌았다. 관람객들은 경탄 감복하고 지금으로 말하면 “거북선 만세!”를 부르고 즐거워하였다.

 
사또, 이런 배가 한 이십 척만 있으면 일본은 커녕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겠소!” 하고 취한 듯이 기뻐하는 사람은 검에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고 새겨가지고 있는 녹도만호 정운과 전 만호 송희립 등 몇 장수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조정의 대장이니 병•수사니 하는 축들이 이름만은 군직에 있다 하더라도 아마 수군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몇 사람이 못 될 것 같다. 거북선의 위력은 다른 병선 수십척을 당할 만하다. 그 속력이 다른 배의 수배가 되고, 내가 적을 쏘아 죽이기는 해도 적은 나를 쏘아 죽일 수는 없고, 전후좌우에 칠십이 포혈이 있기 때문에 일시에 방포하고 화전을 쏘면 전신이 불이요 화살과 철환이어서 적선이 감히 접근을 할 수가 없고, 배의 물 위로 나온 부분은 그 외피가 전부 철갑을 씌웠으며 중요한 곳은 철괴鐵塊로 되어서 적선과 마주 부딪치면 나는 성하고 적선은 부서지고, 갑판은 철판을 덮고 그 위에 예리한 송곳과 칼날을 수없이 박았으니 적이 아무리 불을 놓으려 하더라도 철판이 되어서 불이 일지 못하고, 배 등에 뛰어오르려 하여도 뛰어오르는 대로 송곳과 칼날에 끼어 죽게 되고, 입으로 독 연기를 토하여 제 몸을 감추고, 배가 크기 때문에 물과 군량을 많이 실어 오래 항해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배는 그 때 세상에 동서양을 물론하고 다시없는 군함이었다.

거북선의 길이가 113척이요 어깨의 너비가 12척이요 허리의 너비가 25척이요 꼬리의 너비가 11척이요 높이가 8척이요 두께가 모두 4촌이요, 이물은 높이가 4척이요 좌우 어깨에 천자 포혈 하나씩을 뚫었고, 고물은 높이가 10척이요 한 복판에 구멍을 뚫어서 키를 꽂게 하였다.

이물에는 거북의 머리 즉 용두龍頭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13척이요 넓이가 3척이며 그 속에 유황과 염초 등을 피워 입을 벌리고 연기를 토하면 안개와 같아서 적으로 하여금 내 몸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거북선의 형상을 간단히 말하면 배 위에는 갑판을 덮고 십자의 길을 내어 우리 군사가 그 길을 알아서 통행하게 하였으며 길 밖에는 전부 예리한 송곳과 칼날을 꽂아서 발붙일 곳이 없게 하고 그 위에는 짚자리를 덮어 송곳과 칼날을 꽂은 줄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였다.

꼬리에는 키를 꽂아 배의 방향을 돌리고 전후좌우에는 칠십이의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대포와 화전과 궁시를 쏘게 하였는데 가장 신출귀몰한 동작을 하게 되었다. 거북선의 등에는 청색으로 거북무늬를 그려서 바다에 뜨면 물결과 흡사하게 보여 일종의 보호색이 되고 앞가슴에는 쇠닻을 매었으며 등에는 일척 오촌되는 홈을 내어 돛대를 세우고 누이고 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거북선에 사용하는 대포는 2종이 있으니 그 이름은 대완구大碗口18)와 불랑기佛朗機19)라 하였다. 대완구의 위력은 불랑기보다 그 파괴력이 10배 이상이 되고 불랑기의 위력은 그때에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보다 또 10배 이상이나 되었다.

새 수사 이순신이 일본에서는 조총을 사용하는 줄 알았다. 저들은 조총을 사용하면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응전하리라는 것이니 즉 천•지•현자총을 연구한 까닭이었다. 순신은 기술이 우수한 철공을 모집하여 대완구의 제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많은 개량을 하였다. 이밖에도 대장군전大將軍箭이라는 대폭탄을 발명하여 내었다. 적선을 파괴하기는 첫째로 거북선이요 둘째로 대장군전이요 셋째로 대완구 및 불랑기였다.
대포의 유래는 명나라 사람이 서양 사람에게 배운 것인데 우리 조선에 전래하기는 오래지 아니하다.

당시에 조선 무장으로 이 대포의 이로움과 제조방식을 아는 이는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진주목사 김시민과 울산병사 이각의 무리 몇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순신이 이들 무기를 많이 조성하여 거북선 외에도 다른 판옥선에도 비치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무서운 대장군전은 수사의 지휘선에 비치하여서 후일의 전과를 기대하였다.[화약을 발명하기는 중국이 세계에서 최초요, 몽고로 전하여 성길사한이 서양에 전하였다. 서양에서 조총을 발명하였다.]


이공의 최초 싸움인 옥포전투의 승첩서에 “포와 화살을 쏘니 바람과 우레 같았습니다” 하고 기록하였고 또 당포에서 적을 무찌른 장계에 “신이 일찍이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어 입으로 큰 포를 쏘고 이어 천•지•현자 각양 총통을 쏘니 바람과 우레처럼 나갔습니다” 하었으며 또 “대장군전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적선을 부수었습니다” 하였은즉 이로 보건대 이공이 일본군보다 대포는 먼저 사용한 증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후인들은 다만 철갑선의 원조인줄만 알고 동방 대포의 선배인 줄은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낙안20) 군수 심극성沈極星이 거북선의 성능이 이렇게 정예함을 본 뒤에 “참 사또는 신인이시오마는 일본군이 침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통신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말을 들으면 풍신수길은 대사를 행할 인물이 못되더라고 합니다” 한다.
순신은 답하되 “일본군이 정녕 침범할 것이오. 거북선 이십척만 지어 놓은 뒤면 수길이 친히 온들 염려가 적겠지마는…” 하였다. 이 말은 일방면의 대장의 책임 관념에서 나온 말이요, 결코 그 지능과 선견지명을 자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정에서 수길의 위인과 그의 뜻을 정찰하려고 보냈던 사신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이 돌아와서 고한 말을 가리킨 것이다. 그때에 상사上使 황윤길의 말은 “수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비범한 인물이니 필연코 큰 뜻을 품어 조선을 범할 것 같다”고 하고 부사副使 김성일의 말은 그와 반대로 “수길은 눈이 쥐 눈 같고 외모와 언어로 본다면 하잘 것 없으니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어느 말을 믿을 바를 몰랐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은 동인이다. 그래서 동인들은 김성일의 말이 옳으니 군비를 필요시하지 아니하고 서인들은 황윤길의 말이 옳으니 군비를 하자고 하였다. 선조는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다. 선조는 대세를 보기에 어두웠다. 낙안군수 심극성은 서인이기 때문에 그는 동인의 영수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새로 좌수사가 된 이순신의 하는 일을 좋게 볼 리는 없었다.

거북선의 신묘한 동작과 나아가 그 거북선 20척을 건조할 계획을 가졌다는 말까지를 상세히 써서 자기와 친분 있는 대장 신립에게 보고하였다. 금위대장 한성판윤인 신립은 서인이었다. 북변에 있을 때부터 이순신은 지와 용을 함께 갖춘 영걸임을 목격하였다. 이제 심극성의 보고를 보고는 서인의 선배들을 찾아 그 의향을 들어본 뒤에 이순신으로 하여금 장래에 대성공을 이루게 함은 유성룡 일파의 세력을 증진함이라 하여 단연히 순신의 수군 대확장 특히 성공이 미지수인 거북선 건조를 금지할 것을 선조에게 진언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서인들 중에도 이덕형李德馨 김명원 같은 사람들은 편당색채가 없는 이순신의 계획을 적극적으로는 억압할 것까지는 없다고 했다한다. <다음호에 계속>


주석
1) _대솔군관帶率軍官 : 장수를 수행하는 군관.
2) _남천익藍天翼 : 남색 철릭. 무관이 입었던 남색 공복. “융복戎服” 또는 “군복軍服”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 연결시킨 형태의 포袍이다. 조선시대 왕을 비롯한 문무관이 착용하던 곧은 깃의 포로, 소매가 넓고 상의(저고리)와 하의(치마)가 붙어 있으며 치마에 잔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철릭은 원래 단령 밑에 입는 받침옷으로 항상 입도록 하였는데, 이는 비상시 단령을 벗으면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3) _무청전대靑戰帶 : 군복 위로 둘러 묶는 띠. 직사각형으로 마름질하여 나선형으로 박아 좁고 긴 자루모양으로 만든다. 양 끝을 막아 비상시에는 식량을 넣기도 하였다. 가슴께에서 한 번 둘러매고 그 나머지는 앞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장교 이상은 푸른색 명주, 군졸은 무명으로 함. 충무공은 7년 동안 몸에서 전대를 풀어 놓은 일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4) _은정자銀頂子 : 전립 꼭지에 다는 은으로 만든 장식.
5) 홍상모紅象毛 : 전립의 꼭지 아래에 매다는 붉은 색 술.
6) 호수虎鬚, 공작미孔雀尾 : 전립에 꽂는 장식. 각각 호랑이 수염과 공작 깃으로 만들어짐.
7) _양전립凉戰笠 : 전립은 무관이 착용하던 모자이다. 주로 군복차림에 사용하였으므로 전립戰笠이라고도 하고 재료가 짐승의 털을 다져서 만들었으므로 전립氈笠이라고도 한다.
8) _우후虞候 : 각 도 절도사에 소속된 관직. 각 도의 주장主將인 절도사의 막료로서 주장을 보필한 까닭에 아장(亞將 : 副將)이라고도 한다. 수군우후는 정4품, 육군인 병마우후는 종3품.
9) _강관絳灌 : 중국 전한 고조高祖~문제文帝 때의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을 함께 부르는 말. 무신武臣을 가리킨 것이다.
10) 조졸漕卒 : 배를 움직이는 사공沙工•격군格軍•조군漕軍•수부水夫 등을 통칭하여 조졸이라 하였다.
11) 궁고弓櫜 : 활집.
12) _종선從船 : 큰 선박에 딸린 작은 배.
13) _사후선伺候船 : 전투함에 부속된 비무장 소형 선박으로서, 적의 형편을 정찰•탐색하는 척후斥候에 쓰였다. 모양은 소형의 돛과 키를 갖춘 범로선帆櫓船으로서 임진왜란 중에 출현한 군선이다. 정원은 타공舵工 1명, 격군格軍 4명이다.
14) 비정飛艇 : 쾌속정.
15) _엽사葉槎 : 뗏목.
16) _아단단지 : 소이탄燒夷彈 종류의 불을 뿜어내는 폭발물.
17) _살별 : 혜성彗星의 우리말.
18) 대완구大碗口 :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보성의 5읍.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 가리포의 6진.
19) _불랑기佛朗機, 佛狼機, 佛郞機 : 명나라를 통해 전해진 유럽식 청동제 화포. 미리 준비된 자포子砲를 모포母砲에 삽입하여 발사하는 방식이 특징이다. ‘불랑기’라는 말은 중국과 교역을 하던 아라비아인들이 유럽인을 파랑기(Farangi : 프랑크Frank에서 유래)라고 부른 데서 생겼다고도 하고, 또는 포르투갈의 중국식 표기라고도 한다.
20) 낙안樂安 : 현재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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