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그린 북(Green Book)❺

1960년대로선 흔치 않게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 돈 셜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야만성’을 체감하고 고민할 법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긴커녕 눈길조차 안 준다. 차별과 탄압에 대책 없이 울부짖는 흑인들도 꼴 보기 싫고, 거칠고 폭력적인 저항도 ‘인텔리’ 흑인이 보기엔 가당찮을 뿐이다.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상대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상대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인종차별의 모순과 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최고조였던 1960년대, 미국의 ‘이슬람 국가(Nations of Islam)’ 운동도 절정기를 맞는다.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자신들을 구원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백인들의 신’인 예수를 포기하고 예수와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듯한 마호메트에게 달려가 하소연해 보기로 한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적의 적을 만나면 터무니없는 동지애가 불끈거리고 엔도르핀도 솟구친다. 

말콤 X(Malcolm X)로 대표되는 이슬람 국가의 전투적인 흑인지도자들은 백인과의 평등에 대한 주장을 버리고 백인에 대한 ‘흑인 우월주의’를 표방한다. 말콤 리틀(Malolm Little)이 본명이었던 그는 아마도 조상들의 백인 주인이 대충 던져줬을 치욕스러운 성을 부정하는 상징적 이름으로 말콤 X로 개명한다.

당시 세계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도 캐시어스 X로 개명한다. 훗날 권투선수 캐시어스 X는 정식으로 이슬람 국가 운동에 참여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해 무하마드 알리가 된다. 영화에서 돈 셜리를 연기한 흑인 배우 마허샬라 알리(Mahershala Ali) 역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길모어(Gilmore)라는 미국 성을 버리고 개명한 인물이다. 덕분에 마허샬라 알리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최초의 무슬림으로 기록된다.

 

돈 셜리는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긴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돈 셜리는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긴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 돈 셜리는 이슬람식 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 그의 복식이나 ‘사미르’라는 무슬림 집사를 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역시 ‘이슬람 국가’가 표방하는 가치에 상당히 공감하고 동조하는 듯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돈 셜리의 행태는 ‘흑백 평등’이라기보다는 흑인 우월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웬만한 교양 있는 백인들보다 더욱 우아한 몸짓과 격조 있는 언어를 구사하려 노력한다. 감정도 극도로 절제한다. 표정의 변화도 없다. 거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신사’와 같은 모습이다. 

백인 토니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좌석에 몸을 묻은 채 떠난 남부지방 콘서트 투어 중 휴게소 마당에서 색깔 좋은 조약돌 판매대를 만난다. 토니가 판매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록색 조약돌 하나를 주워 슬쩍 주머니에 넣는다. 이를 지켜본 돈 셜리는 토니에게 조약돌을 다시 돌려놓으라며 교장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지시한다.

‘백인’ 토니는 훔친 것도 아니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돈 셜리는 그 돌을 돌려놓지 않으면 해고할 것이라 경고한다. 흑인이 백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과시한다. 다시 길을 떠나 흑인을 차별하는 경찰에 ‘천박한’ 폭력을 휘두르는 토니에게 돈 셜리는 또다시 엄히 질책하며 인내와 설득을 강조한다. 거의 마하트마 간디의 재림再臨이다.

돈 셜리가 굳이 ‘백인 우월주의’가 유난히 극성스러운 남부지방에서의 위험한 콘서트 투어를 감행한 가장 큰 이유 역시 그들에게 흑인이 백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돈 셜리는 흑백문제의 해결책으로 흑백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증명하며, 또한 인정받고자 한다. 그의 노력은 보상받았을까.

 

모든 관계에서 공정과 평등을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뉴시스]
모든 관계에서 공정과 평등을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뉴시스]

상대적 약자들의 강자들에 대한 평등의 요구가 벽에 부딪혔을 때 우월주의가 득세하곤 한다. 안타깝지만 평등이란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과학은 아니다. 평등한 관계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상태이지 약자에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강자에게는 지금의 불평등한 관계가 가장 평등한 관계다. 상대와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우위를 점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을 ‘인정욕구’라고 정리한다. 평등을 요구하는 ‘평등인정욕구’는 평등을 달성하는 순간 바로 상대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우월인정욕구’로 바뀔 뿐이다. 평등이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가상假想의 좌표일 뿐이다.

‘너에게 평등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 ‘너의 위에 서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계급투쟁의 역사가 그러하고 국제관계의 역사가 또한 그러하다. 남녀관계·가족관계에서부터 노사·정치·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정과 평등을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상대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그래서 평등이라는 좋은 말을 하면서 사생결단이 돼버리고 증오와 분노가 넘쳐난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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