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그린 북(Green Book) ❻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법적으로는 해방됐지만 실질적인 해방과 평등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은 곧 평등’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고 해서 일본과 평등해진 게 아닌 것처럼, 흑인들이 노예로부터 해방됐다고 즉시 백인과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선 많은 재벌이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21세기 한국에선 많은 재벌이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까지 미국의 남부 일부 주에서는 학교와 극장과 같은 공공시설, 화장실은 물론 대중교통수단까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주에서는 영화 속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흑인은 일몰 후엔 외출조차 금지됐다. 

심야에 백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자리에 점잖게 앉아 국도를 달리던 돈 셜리는 흑인이 밤중에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된다. 백인들의 호텔 파티에 피아노 연주자로 초청된 돈 셜리지만, 화장실은 호텔 밖 ‘뒷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노예에서 해방은 됐지만 흑인들은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의 신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몸이 닿는 것조차 끔찍한 환자 같은 신분이다.

실수로라도 백인들의 식당이나 시설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목숨까지 위험한 봉변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부 지방을 여행해야 하는 흑인들을 위한 우울한 가이드북이 발행되기도 했다. 그 이름이 조금은 생뚱맞게도 ‘그린 북’이다. 아마도 녹색이 ‘안전’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에 표지를 녹색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린 북’에는 지역별로 흑인들이 출입해도 무방한 호텔·레스토랑·주유소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흑인도 이용 가능한 시설’이지만, 불가촉천민 취급하는 흑인들이 이용하는 시설에 굳이 찾아갈 백인이 있을 리 없으니 실제로는 ‘흑인 전용시설 안내서’인 셈이다.

그린북은 유색인종 전용 숙박시설·음식점 등을 소개한 여행 가이드북이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린북은 유색인종 전용 숙박시설·음식점 등을 소개한 여행 가이드북이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백인 운전사 토니 역시 자기가 모시는 ‘주인’인 돈 셜리를 허름하고 칙칙한 흑인 전용 호텔에 ‘모셔다’ 드리고 자신은 차를 돌려 그보다 훨씬 그럴듯한 백인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 그리고 아침이면 주인을 모시러 폐가 같은 흑인 호텔로 차를 몰고 간다. 참으로 기묘한 장면이다.
 
사람들이 누리는 ‘자격’에는 두 종류가 있다. 주어진 자격, 성취한 자격이다. 정체성에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정체성과 살아가면서 선택한 정체성이 있다.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자격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 자격이다. 돈 셜리의 뉴욕 카네기멜론 홀 2층에 자리 잡은 으리으리한 사무실은 그의 성취한 자격을 상징한다.

그러나 흑인차별이 마치 조선시대 반상의 법칙 같은 앨라배마주에서 그는 성취한 자격은 인정받지 못하고 대신 ‘흑인’이라는 ‘주어진’ 자격만이 통한다. 토니는 ‘성취한 자격’만으로 본다면 당연히 돈 셜리보다 못한 숙소에 묵어야 하지만, 백인이라는 ‘주어진 자격’ 덕분에 돈 셜리보다 좋은 숙소가 허락된다. 흑인은 그가 선택한 정체성이 아님에도 마치 그가 선택한 것처럼 그 책임을 묻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은 실로 부당하다.

일부 재벌은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사진=뉴시스]
일부 재벌은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사진=뉴시스]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에서만 이러한 ‘자격’의 혼돈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적지 않은 재벌들이 그들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는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너절한 백인이 흑인만 보면 사냥개처럼 사나워지듯 주어진 자격이 별것 없는 사람만 보면 그가 성취한 자격과 상관없이 쌍욕에 손이 올라간다.

연예인도 성취한 자격보다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자격으로 꽃길만 걷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성취한 자격은 충분한데도 주어진 자격이 신통치 못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하염없이 비를 피해야 하는 사람들의 심사가 돈 셜리만큼이나 복잡하다. 내가 선택한 어느 지역 고향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성性도 아닌데 나에게 그 책임을 묻고 내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여전히 폐가 같은 흑인 전용 호텔의 남루한 침대에서 잠 못 이루고 천장을 응시하는 돈 셜리의 복잡한 표정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 책임추궁 당하는 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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