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앞선 일본 쫓으려면…

지난 4일 일본 정부가 경제보복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수출하는 일부 품목의 규제를 강화한 것. 불똥은 반도체 업계에 튀었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쓰이는 핵심소재가 규제품목에 올랐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엔 경고등이 울렸다. 반도체 소자 기술은 뛰어나지만 소재 분야에선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소재산업이 약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외양간을 고칠 때도 됐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한국 부품소재 산업의 현주소를 취재했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힘을 못 쓰는 건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가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힘을 못 쓰는 건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때론 외교 문제가 경제 문제로 번진다. 상대국의 경제적 약점을 쥐고 흔들면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과 중국의 사드보복은 정치 문제가 경제에 영향을 미친 단적인 예다.

지난 4일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수출 규제를 감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데 따른 보복행위라는 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은 국제법에 따라야 한다”면서 “서로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없다”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바 있다. 

일본이 노린 우리나라의 약점은 반도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 비중은 약 20%(2018년)에 이를 정도로 높지만 반도체 소재나 장비 분야에선 경쟁력이 낮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3가지 품목(플루오린 폴리이미드ㆍ포토 레지스트ㆍ고순도불화수소)의 수출을 규제했는데, 그 중 2가지 품목(포토 레지스트ㆍ고순도불화수소)이 반도체 제조공정에 쓰이는 핵심소재다.[※참고 :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플렉시블(휘어지는ㆍflexible) OLED 패널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 품목도 일본 의존도가 90%에 달한다.] 

일본 정부의 규제에 따라 해당 품목은 수출 절차가 까다로워진다. 기존엔 한번 수출허가를 받으면 3년간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매번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한다. 심사기간은 통상 90일가량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해당 제품이 국내에 들어오는 시간이 지연될 수 있다는 거다. 경우에 따라선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두 소재 모두 일본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포토 레지스트는 약 90%, 고순도불화수소는 50~70%를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두 품목의 수출 절차가 까다로워지면 그만큼 반도체 생산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에선 “일본의 수출 규제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포토 레지스트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주로 쓰이는데, 아직 연구ㆍ개발(R&D) 단계라 급하진 않다”면서 “다만, 고순도불화수소는 높은 수준의 공정에서 쓰이기 때문에 수출이 제한되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반도체 경기가 불황이라 재고가 남아있지만, 고객사들이 이번 이슈로 인해 반도체를 미리 사들일 수도 있다”면서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수록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반도체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고는 2~3달가량 판매할 수 있는 물량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고객사들이 사재기에 들어가면 재고는 더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 일부에선 “90일가량 미리 주문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고순도불화수소의 유효기간은 통상 2~3달. 예측한 수요가 빗나가면 미리 주문한 제품을 다 소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의 수출 규제를 놓고 우리나라를 압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에도, 올 1월에도 양국이 외교 마찰을 빚을 때마다 일본 정부는 이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번 사태를 잘 넘긴다고 해도 약점을 극복하지 않는 한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지만 산업에서도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율을 높이는 일이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내에서도 포토 레지스트와 고순도불화수소를 만드는 업체가 있다. 다만, 일본에 비하면 기술력과 품질이 낮다. 국내 기술이 일본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문가들은 ‘원천기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의 규제를 강화했다.[사진=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의 규제를 강화했다.[사진=연합뉴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는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전엔 패권이 미국과 일본에 있었다”면서 “미국에 있던 패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본이 신공정과 함께 장비, 소재를 함께 개발했는데, 우리나라의 반도체는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반도체가 일본의 원천기술을 따르고 있다면 소재나 장비도 일본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가장 오래 생산ㆍ개발해온 일본 제품의 품질이 더 뛰어난 이유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새로운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의 방식을 유지해선 국산화율을 높이긴 어렵다”면서 “결국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 차세대 반도체를 우리나라에서 개발해야 한다는 건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소재와 장비를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상적인 얘기지만 새로운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건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박재근 한양대(융합전자공학) 교수는 반도체 소재 분야를 육성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기술력을 갖춘 혁신 기업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의 대기업들이 점유하고 있는 소재 시장을 뚫기 위해선 반도체 기업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거다.

둘째는 정부가 나서 소재나 장비업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재나 장비는 제품을 개발한다고 끝이 아니다. 개발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능을 점검하고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소재ㆍ장비업체들이 성능평가장비를 도입하기엔 부담이 크다. 정부가 성능평가팹을 조성한다면 소재ㆍ장비업체들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마지막은 해외기업을 인수ㆍ합병(M&A)하거나 로열티를 주고 기술을 도입하는 방법이다. 이는 소재ㆍ장비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박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는 소재의 기반이 되는 화학기술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면서 “그럼에도 소재나 장비를 육성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이를 위해선 정부와 대기업의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강국의 명성이 일본의 말 한마디에 흔들렸다. 반도체 소자 기술에 비해 소재ㆍ장비 분야가 약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약점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를 키우는 것도 좋지만 산업의 밑단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는 한국 반도체가 풀어야 할 과제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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