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일본 넘어서려면…

부품이 없으면 기계가 돌아가지 않는다. 더구나 부품은 소모성이어서 때가 되면 새것으로 갈아끼워야 한다. 부품생산업체가 ‘갑’, 이 부품이 필요한 업체가 ‘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한일 경제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논리다.  

한국의 기계 중 상당수는 ‘일본산 부품’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작은 기계든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계든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일對日 무역수지가 늘 적자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갑이었고, 한국은 을이었다.  일본이 이런저런 명분을 꺼내들면서 한국경제를 공격한 배경에도 ‘흑자국’이란 자신감이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대응책을 모색 중이다. 대단한 게 있을 리 없다. 부품ㆍ소재업체 육성하고, 중소기업 키우자는 게 전부다. 그런데 흥미로운 보고서가 하나 있다. 9년 전인 2010년 중소기업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의 대일본 무역역조 원인과 전망’이란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무역역조 원인과 해법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9년 전 중기연 보고서에서 해법을 찾아봤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양국 모두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일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양국 모두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이 확대되고 있다. 7월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생산의 핵심 소재 3종의 한국 수출을 제한했고, 8월엔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ㆍ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제외시켰다. 추후 조선과 농수산, 금융 등으로 확전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대응 시나리오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극일克日이다. 이는 우리 정부의 방침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가 현실로 나타나자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은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보복에 기술 자립과 수출규제로 응전하겠다는 의지다. 둘째는 협상이다. 이는 정부 강경대책의 대척점에 서있는 대응전략이다. 일본 수출규제가 우리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무책임하게 반일 감정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게 주장의 골자다. 

부품ㆍ소재 국산화가 단기간에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일본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거다. 여기엔 내부 성장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중 무역전쟁으로 힘겨운 한국경제에 일본의 보복까지 겹치면 ‘제2의 외환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있다. 

양극단에 놓인 대책들

하지만 두 대안 모두 실리를 찾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수출제재를 먼저 당한 한국 정부가 협상카드를 꺼내는 건 명분이 없다. 일본 정부가 손쉽게 협상테이블에 앉을 가능성도 낮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어질 강제징용 관련 배상 규모를 추산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두고 극일을 강조했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두고 극일을 강조했다.[사진=연합뉴스]

격차를 좁혀오는 한국경제도 경계해야 한다. 더구나 반일이나 혐한 정서를 자극하는 건 일본 집권층이 표를 얻는 데 손쉬운 수단이다. 순조로운 협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치킨게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현안마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순 없는 일이다. 한국 증시는 일본 정부와 날을 세운 후유증을 혹독하게 겪었다. 5일 코스닥은 장중 6.1%포인트 넘게 하락하면서 사이드카까지 발동됐다. 6일 코스피는 장중 1891.81로 떨어졌다. 코스피가 1900선 아래로 내려간 건 2016년 6월 이후 처음이다.[ ※ 참고:증시가 타격을 입은 건일본도 마찬가지다. 닛케이225 지수 역시 5일 -1.74% 하락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보복 조치는 양국 모두에게 피해”라고 언급한 건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한일 경제전쟁을 빠져나올 수 있는 해법은 없을까. 

다시 일본의 조치를 짚어보자. 제재의 신호탄이 됐던 반도체ㆍ디스플레이 핵심부품 3종의 지난해 수입액은 50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 반도체 산업을 떨게 할 만큼 위협이 됐던 건 마땅한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해법은 핵심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시스템에서 찾아야 한다. 중소기업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의 대일본 무역역조 원인과 전망’은 이런 양국의 무역구조를 잘 분석한 보고서다. 

흥미로운 건 이 보고서가 9년 전인 2010년 12월에 발표됐다는 점이다. 발간 배경은 ‘심각했던 한국의 대일對日 무역수지 적자’다. 2010년은 361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대일 무역손실을 낼 때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양국의 불균형한 무역 구조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다. 1960년대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경제협력이 시작된 이후,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술력도 우수한 일본은 최고의 무역 파트너가 됐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한국 기업에 기술이전을 극도로 꺼렸다.

적자를 불가피하게 만든 구조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생산에 필요한 원료부품(중간재)ㆍ기계 설비(자본재)를 일본으로부터 사들여 한국기업이 이를 조립ㆍ가공한 완제품을 글로벌 시장에 수출하는 구조다. 보고서는 “수출이 증가하는 만큼 대일 적자 규모가 커지는 구조가 이때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의존을 줄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78년 ‘수입선다변화 제도’를 도입한 게 대표적이다. 무역적자폭이 큰 품목을 대상으로 수출을 규제하는 장치였는데, 타깃은 일본 제품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앞두고 자유무역 기조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1999년 폐지됐다. 뒤이어 2001년엔 ‘소재ㆍ부품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제정했다. 국산 부품의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지원정책이었다. 보고서는 “그럼에도 소재부품특별법 발효 이후에도 무역수지가 두배 이상 증가했고, 부족한 부품소재 기업은 여전히 문제점으로 꼽힌다”고 탄식했다.

또 하나 주목할 건 이 보고서가 5052개 수출품목의 한일 기술경쟁력을 비교했다는 점이다. 이중 575개가 한국이 일본 의존도가 큰 품목이자 일본의 경쟁력이 월등히 우수한 것으로 조사됐다. 심각한 건 이 품목들이 대일 무역적자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부분 한국의 주력 수출업종의 부품이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무역수지 적자를 유발하는 이런 품목들은 일본의 기술력을 당장에 앞지르기 어려운 만큼 한일 자유무역협정(FT A), 일본기업 인수ㆍ합병(M&A) 등의 장기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9년 전과 지금의 대일 무역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전체 대일 무역적자 240억 달러 중 62.9% (151억 달러)가 소재ㆍ부품 산업에서 나왔다. 여전히 한국의 수출이 증가할수록 실속은 일본이 챙기는 악순환이다. 

실제로 한국의 글로벌 수출과 대일 수입은 정(+)의 관계를 띠고 있었다. 한국의 수출이 15.7%로 큰 폭으로 증가하면 일본 수입도 15.1% 증가하고(2017년), 한국의 글로벌 수출이 1.2% 감소하면 일본 수입도 6.7% 감소(2012년)하는 식이다. 적자규모가 유난히 큰 품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제통일상품분류체계(HS코드)에 따른 무역수지 적자 상위 10개 품목 중 8개 품목이 9년 전과 동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9년 전에도 지금처럼…

보고서를 작성한 오동윤 동아대(경제학) 교수는 “정밀소재를 개발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하는데, 단시간에 수출규모를 키우는 전략을 선택한 한국경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면서 “일본이 우리가 필요한 소재와 부품을 저렴한 값에 공급하고 있다 보니 우리 기업이 개발에 적극 나서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이번 사태 역시 일본 기술 생태계에 속박된 역사가 긴 한국경제가 언젠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덧붙였다.

불균형한 대일 무역구조는 한국경제가 수출의 열매인 성장과 고용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결과로도 이어졌다. 극일이 우리의 선택지라면, 그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본과의 교역구조를 평평하게 만드는 게 먼저다. 9년 전 중기연 보고서의 경고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더  늦으면 한국경제의 극일은 실패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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