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파트1] 金의환향 스트레스

▲ 값비싼 선물을 한가득 품에 안고 고급 외제차를 탄 채 기세등등하게 귀향하고 싶은 금의환향에 대한 집착이 민족의 가윗날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스라치게 추운 寒가위다. ‘금의환향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럴듯한 추석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당당하게 고향 문턱을 넘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다. 고가의 선물 세트 앞에서 한숨짓고 외제차 앞에서 좌절한다.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부동산 시행사 A업체는 2008년 법인 설립 후 아직까지 매출이 없다. 반면 지난해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은 각각 33억원, 63억원이었다. 부채는 무려 500억원에 달한다. 무리하게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본잠식 상태다.

A사의 대표는 직원들에게 “분양만 잘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왔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동산 경기 침체는 날로 깊어지고 있고, 대형 건설사들은 줄줄이 분양 일정을 늦추고 있다. A사로선 올해 매출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제 남은 것은 빚뿐이다.

 
갚아야 할 이자만 해도 매달 2억5000만원에 이른다. 직원 월급은 수개월째 밀렸고, 퇴직자들은 “월급 내놓으라”며 아우성 치고 있다. A사 창립멤버 박철진(37) 전 경영기획실 팀장도 9월 초 사표를 던졌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먹일 분유 값조차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취업센터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들렀지만 이렇다 할 소식은 아직 없다. 그는 “경기가 바닥인데 누가 나를 찾겠는가. 하필이면 추석을 앞두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철진 전 팀장은 2남 중 장남이다.

 
남동생은 비교적 괜찮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 차장이다. 그는 “장남 체면이 말이 아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추석 때 귀향을 아예 포기할 참이다. 전남 순천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서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제대한 원영민(33)씨. 그는 신림동 고시원 사장이다. 2005년 장모 돈을 빌려 고시원을 차렸다. “대신 2년 안에 사법시험을 패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원씨는 올 사법시험 1차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벌써 세 번째 낙방이다. 이제는 아내 보기조차 민망하다. “허송세월을 하는 것 아니냐”“취직이나 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질책도 견디기 힘들다. 그는 올 추석 경북 상주 처가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다. 내심 변호사 사위를 바라는 장인어른과 장모에게 낯 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 혹독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가위가 아니라 ‘寒가위’다. 추석 한가위는 한 해 동안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거둔 결실을 조상께 감사하는 민족 최대 명절이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에 관한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선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추석)만 같아라’고 했다.

추석은 그만큼 풍성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추석을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이 많다. 바로 실업자들이다. 통계청은 2012년 8월 실업자 수가 76만4000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아예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도 22만5000명에 달한다. 전년 동기보다 1만5000명이 늘어났다.

▲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서 국내산 자연송이를 kg당 130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극심한 불황으로 지갑은 얇아지는데 귀성객의 잠재 욕구를 파고드는 시장의 유혹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들은 과연 추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인사취업 전문기업 인크루트가 지방이 고향인 서울 거주 구직자 346명을 대상으로 추석연휴 귀성계획 관련 설문을 실시했다. 응답자의 30.1%가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귀성하지 않는 이유로 “구직 실패로 가족, 친지를 만나기 부담스러워서”(31.7%)를 가장 먼저 꼽았다. “하반기 공채가 한창이라 취업준비를 하기 위해서”(13.5%)라는 응답도 있었다. 추석보다는 구직이 먼저라는 것이다.

한편 고향에 내려갈 구직자들에게는 친지의 질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입사지원 경험을 얘기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한다”(38%)가 꼽혔다. 그밖에 “화제를 돌린다”(8.7%), “곧 취직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7.9%) 등의 응답도 나왔다.

불황에도 금의환향 욕구는 여전

 
구직센터에서 만난 한 실업자는 “빨리 취직해 양복 입고 부모님 찾아뵙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실업자도 “멋들어진 모습으로 ‘고향 앞으로’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하소연했다.

이를테면 ‘금의환향錦衣還鄕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셈이다. 금의환향의 사전적 의미는 출세의 상징인 비단옷(금의)을 입고 귀향한다는 것이다. 출세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돈을 많이 벌어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 ‘金의환향’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결국 ‘금의환향 스트레스’는 돈 가뭄에 기인하게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추석 ‘금의환향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업자뿐 아니다.

직장인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경제 불황 탓에 지갑이 얇아져,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하는 추석 연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이 1081명을 대상으로 “추석 연휴 금전적 지출에 부담을 느끼십니까”라고 설문한 결과 72.2%가 “그렇다”고 답했다. 기혼자가 79.5%로 미혼자(67.4%)보다 더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들이 괴로운 이유는 연봉보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봉전문 사이트 페이오픈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대리 직급 기준 평균연봉은 2010년 3482만원에서 2011년 3632만원으로 4.3% 가량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평균 물가 상승률은 4.7%를 기록했다. 연봉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장인들의 짭짤한 부가수익이었던 추석 상여금을 받지 못하는 직장인도 많아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추석상여금을 지급할 계획이 없는 기업은 전체의 32.9%에 달했다. ‘소비활성화를 위해 소득세 원천징수 감액분 환급을 추진할 계획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정상 추석 후 환급예정”이라고 답한 기업도 38.1%로 조사됐다.

주부들의 가슴앓이가 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대문 시장에서 만난 주부 강숙례(39•서울시 송파구)씨는 “추석 상여금을 기대할 수 없어 차례상을 차리기도 막막한데 물가까지 올라서 답답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재래시장에서 ‘공포의 추석 물가’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게 강씨의 말이다. KPI 한국물가정보에 따르면 지난해 추석 무렵 1개에 700원(2011년 9월 16일)하던 애호박은 2000원(2012년 9월 14일)까지 올랐다. 그나마 전 주(2012년 9월 7일)에 비해 300원 떨어진 가격이다. 지난해 한단에 4000원하던 미나리는 6000원으로 올랐다. 역시 전 주에 비해 1000원 떨어졌다.

한국물가협회의 김기일 연구원은 “이번 추석 물가는 유난히 잦았던 자연재해의 직격탄을 맞았다”며 “여름철 폭염으로 채소류 작황이 좋지 않았는데 태풍 볼라벤, 덴빈에 이어 산바까지 한반도를 지나면서 출하작업에도 차질이 생겼다”고 말했다. “특히 시설작물의 피해가 커 추석 물가가 천정을 찌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실업자, 구직자만 한가위가 고달픈 게 아니다. 직장인의 72.2%가 “추석연휴 금전적 지출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사진:뉴시스>

여기까진 약과다. 주부들의 진짜 고민은 따로 있다. 부모님께 추석 용돈을 드려야 하고, 지인들에게 선물도 돌려야 한다. 불경기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게 주부들의 이구동성이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황명자 부회장은 “시어머니 연세가 아흔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매년 초 명절 수입 예산을 잡는 것이 당신 인생의 낙”이라며 “가계 사정과 상관없이 추석 선물과 용돈을 꼭 드려야 한다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추석비용보다 용돈이 더 부담

경기는 악화되는 데 고가선물의 매출이 높아지는 것 또한 역설적이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는 추석 직전 2주 동안 팔린 고가(30만원 이상) 추석선물세트의 매출 추이를 조사했다. 11번가 문지형 과장은 “30만원대 영광굴비 세트의 매출은 2011년 전년대비 100% 증가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지난해 대비 무려 120% 증가했다. 살기가 팍팍해질수록 뒤틀린 과시형 소비가 성행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사례 한 토막이다. K증권사에 다니는 김수정(30)씨. 그는 올 초 신혼살림을 차렸다. 결혼 후 맞는 첫 번째 추석이라 손윗동서가 무슨 선물을 할지, 부모님 용돈은 얼마를 챙겨드려야 할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시부모는 “돈 없으면 그냥 와도 괜찮다”고 하지만 애꿎은 눈총을 받을까 두렵다. 김씨는 요즘 백화점 선물세트 선전물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는 상주곶감 42개가 들어있는 곶감세트가 12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다.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한과 선물세트는 최하 5만원부터 시작이다. 김씨는 “그래도 추석인데 그럴듯한 선물은 사가야 하지 않을까”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금의환향이 곧 ‘부의 상징’으로 왜곡되고 있는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때 고급 승용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귀향한 가장들의 모습은 집안의 자랑이요, 선망의 대상이었다. 추석 즈음에 새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극심한 경기 침체로 신차를 구입하는 현상은 2008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었다. 서준호 자동차공업협회 차장은 “자동차 업계의 추석 특수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신차에서 중고차 시장으로 옮겨갔다”고 설명했다. 중고차 매매 전문 업체인 SK엔카의 김현리 대리는 “추석 전 거래량이 급격히 늘었다”며 “추석 시즌에는 평소보다 전화문의가 늘고 사이트 방문자 수도 눈에 띄게 상승한다”고 말했다. 또 “추석 때는 평소에 비해 중중형•대형 세단의 판매량이 많은 편”이라며 “9월달에 많이 나간 모델로는 그랜저TG와 SM5를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입차 딜러 김정치씨는 “2010년만 해도 에쿠스 매물 120대 중 30대가 8월 말 9월 초에 팔릴 정도로 고급 세단이 잘 나갔는데 요새는 경기 침체로 세가 한 풀 꺾였다”고 푸념했다. 그는 “추석이라 버스 전용 차선을 탈 수 있는 승합차종 카니발의 판매가 많을 것으로 기대해 매물을 준비했는데 허탕이었다”며 “역시 추석 때 차종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성보다는 차의 가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동차 역시 금의환향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소비자교육원 전계순 사무총장은 “금의환향 스트레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다”며 “기왕이면 값비싼 선물을 안고, 좋은 차를 타고 기세등등하게 귀향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총장은 “스트레스에 기인한 구매욕구가 무리한 소비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적지 않다”며 “추석을 감사절 정도로 여기고 효와 감사를 표현하는 명절로 생각하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시욕에서 비롯된 소비보다는 합리적 소비행태를 갖자는 말이다. 일본의 경제 애널리스트 다치키 마코토는 자신의 저서 「일본을 통해 본 부동산 10년 대폭락 시나리오」에서 ‘Going Back to the 1960s Life’를 주장했다. 일본의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 소비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좀 더 오래 타고, 한 달에 세 번 하던 외식을 두 달에 한 번꼴로 줄이는 식으로 말이다. ‘금의환향 스트레스’에 따른 과시욕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다운 기자 justonegoal@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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