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조 초슈퍼 예산안의 함정

경기침체기에 재정은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역대급 재정적자를 용인해선 곤란하다.[사진=연합뉴스]
경기침체기에 재정은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역대급 재정적자를 용인해선 곤란하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가 마련한 내년 예산안은 여러 면에서 ‘역대급’이다. 우선 총지출 규모가 513조5000억원으로 마침내 500조원을 넘어선다. 2011년에 300조원을 넘어선 예산은 2017년 400조원을 돌파하는 데 6년 걸렸다. 그런데 400조원에서 500조원 돌파는 3년으로, 역대급 신기록을 세울 판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예산의 증가속도가 가파른 탓이다. 내년 예산안은 올해 본예산보다 43조9000억원(9.3%) 많다. 9.7% 증액한 올해에 이어 2년 연속 9%대 증가율의 ‘초슈퍼 예산’이다. 예산안은 이듬해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에 맞춰 짜고 ‘수입 내 지출’을 지키려고 애쓰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내년 예산안 증가율은 정부가 예상하는 내년 경상성장률 전망치(3.8%)의 두배를 훌쩍 뛰어넘는 역대급이다.

내수와 수출이 동반 부진한 가운데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경제보복 등 대외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확장재정이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순조로웠던 세금 징수에 올 들어 제동이 걸렸다. 기업 실적이 나빠지면서 세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법인세가 덜 걷힌다. 이미 상반기 국세수입이 지난해 상반기보다 1조원 줄었다.

내년 국세수입은 올해보다 더 줄어들 전망이다. 수입을 초과하는 지출을 감당하려면 국채를 발행해 충당해야 한다. 정부는 올해 33조8000억원인 적자국채(일반회계 적자보전 국채) 발행한도를 내년에 60조2000억원으로 늘릴 방침이다. 1년 새 증가하는 적자국채 발행액(26조4000억원) 또한 가히 역대급 규모다.  

국채 발행이 늘어나는 만큼 국가채무도 증가한다. 내년 국가채무는 805조5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800조원을 넘어선다. 올해 740조8000억원으로 700조원을 돌파할 텐데, 1년 만에 800조원대로 진입하게 생겼다. 국가채무 증가속도는 갈수록 빨라져 4년 뒤 2023년에는 1000조원 벽마저 뚫게 된다. 덩달아 내년 39.8%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46.4%로 치솟는다.

정부는 국가채무비율이 GDP의 100%를 넘는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양호한 수준이라지만, 급하면 달러나 유로, 엔화를 찍어낼 수 있는 기축통화국과 우리는 처지가 다르다. 공기업 부채도 결국 정부가 갚아야 할 빚이므로 이를 포함하면 국가채무비율은 60%를 넘어선다. 세계 유일의 ‘0명대 출산율’이 보여주듯 심각한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복지비용 증대와 통일비용 등을 고려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경기침체기에 재정은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적극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역대급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폭을 용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국가신용등급을 평가하는 무디스 등 신용평가사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가채무 규모보다 채무의 증가속도를 중시한다. 나라 빚은 결국 국민 부담이고, 계속 쌓이면 다음 세대의 부담으로 전가된다. 

재정 만능주의에 빠져 예산만 쏟아붓는다고 ‘적극재정→경제성장→세수증대’의 경제 선순환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산 살포에만 기대지 않고, 과감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들의 사업 기회를 넓혀줌으로써 민간 경기를 부양시키는 정책 전환이 절실하다. 

정부 지출의 구조조정도 함께 해야 재정건전성이 급격히 악화하는 것을 막고 재정집행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정부 예산안의 지출내역을 보면 일자리 예산(25조8000억원)을 포함한 복지 분야가 181조6000억원인 반면 연구개발(R&D), 산업ㆍ중소기업ㆍ에너지, 사회간접자본(SOC) 등 경제성장을 견인할 분야는 70조3000억원에 머문다.

총지출의 35.4%를 차지하는 복지 분야의 씀씀이에 대한 구조조정과 함께 부품소재 개발이나 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성장활력을 높이고 4차 산업혁명에도 대비하는 분야에 재정 투입을 늘리는 게 필요해 보인다. 노인 공공 알바를 늘리는 식의 일자리 예산도 점검해야 한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선심성 사업예산도 솎아내야 할 것이다. 

이런 상당 부분의 일이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역대급’ 예산안이니 국회가 심의를 ‘역대급’으로 잘해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 20대 국회는 마지막 정기국회까지 역대급 파행 신기록을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 늘 그래왔듯 정쟁으로 허송하다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에 쫓겨 졸속 밀실심사에 지역 민원 사업예산을 끼워넣는 구태를 답습해선 안 된다. 
양재찬 더스쿠프 편집인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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