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헤이트풀 8(Hateful 8)❷

미국은 여러모로 참 ‘특별’한 나라다. 국토의 면적과 국부는 물론이고, ‘합중국’이라는 형태나 인종의 다양성 역시 대단히 특별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특별함 못지않게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세계 패권국이 되기까지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대외전쟁을 치렀지만 미국 내에서 치른 대외전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기록이다.

혐오에는 ‘자기보호적 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적 혐오’도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혐오에는 ‘자기보호적 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적 혐오’도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토록 많은 전쟁을 다른 국토에서 치렀다니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다. 미국은 어웨이 경기만 하지 결코 홈경기를 하지 않는 특별한 나라다. 어웨이 경기만 하는데도 무패의 전적이라면 실로 놀랍다.

이런 지구의 ‘안전지대’와 같은 미국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던 단 한번의 전쟁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남북전쟁(18 61~1865년)’이다. 이 전쟁에서 북군·남군 합쳐 약 62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당시 미국 인구의 2%에 해당한다.

고도로 기계화된 살상병기들이 없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62만명의 전사자 수는 미국이 참전했던 모든 전쟁의 전사자 수를 합한 것보다 많은 숫자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미군 전사자가 각각 12만명·32만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4년 내전에 62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남북전쟁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70년이 돼가도록 ‘빨갱이 타령’에 여념이 없는데, 미국이라고 그 전쟁의 후유증이 없다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겠다. 처절했던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혼란의 시대에 와이오밍의 한적한 역마차 여관에 혹한과 눈폭풍을 피해 백인과 흑인, 아직도 군복을 입은 남군 출신과 북군 출신, 그리고 흉악범과 현상금 사냥꾼 등 그렇게 8인이 모인다. 

영화는 처절했던 미국 남북전쟁 후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는 처절했던 미국 남북전쟁 후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악의에 가득 차 있다. 북군의 승리로 공식적·법적으로 흑인이 해방은 됐지만 북군의 장교 복장을 하고 있는 현상금 사냥꾼 흑인 워렌 중령(새뮤얼 L. 잭슨)이 여전히 남군 복장을 하고 있는 백인들의 눈엔 참으로 같잖고 불쾌하다.

흑인 주제에 장교 출신이랍시고, 그리고 승자인 북군 출신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듯한 꼴이 혐오스럽다. 하필이면 흑인 워렌 중령에 포박당해 호송 중인 백인 여자 흉악범 데이지는 오히려 워렌 중령을 내리깔아 보며 당당하다. 워렌에게 가래침을 뱉고 낄낄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혐오’란 특히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아’의 욕구라고 정의한다. 프로이트는 또한 혐오의 감정은 자기 보존의 문제와 직결돼 있음을 강조한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항상 설득력 있다. 미국 남북전쟁은 남군과 북군 합해서 210만명이 동원됐고 그중 30%가 전사한 끔찍한 살육전이었다.

남군·북군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미국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다. 미국인 모두가 자기 보존의 위협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것에 대한 파괴 욕구를 느낄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또한 영국의 심리치료학자인 애덤 필립스(Adam Phillips)는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느껴야만 누군가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다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외부에 적을 창조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는 전통적인 통치의 기법이기도 하다.

일본 내 혐한 분위기는 한국에 추월 당할지 모른다는 초조함의 발로일지 모른다. [사진=뉴시스]
일본 내 혐한 분위기는 한국에 추월 당할지 모른다는 초조함의 발로일지 모른다. [사진=뉴시스]

최근 일본과의 이런저런 갈등이 표면화되고 증폭되면서 일본 내에 거의 생활화한것 같은 ‘혐한’ 분위기가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다. 프로이트나 필립스의 분석처럼 혐오란 기본적으로 ‘자기보호’의 속성을 지닌다.

아마도 1980년대 ‘세계 최고’를 자부했던 일본이 내리막길을 걷고 위기의식을 느끼며 자신들의 쇠퇴와 불행의 원인을 한국에서 찾는지 모르겠다. 간판산업에서 계속 한국에 추월당하는 초조함일 듯도 하다. 혹은 외부의 적을 설정해서 내부의 위로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혐오에는 ‘자기보호적 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넬대학의 심리학자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는 혐오에는 ‘저항적 혐오’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자주를 추구하면서 과거의 혹은 기존의 종속적인 관계를 거부할 때 그 상대에 대해 혐오감이 표출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 ‘혐일’의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면 이는 다분히 저항적 혐오일 듯하다.

자기보호를 위한 혐오와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적 혐오는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꼴 보기 싫다고 어느 한쪽이 이사를 가버릴 수도 없는 이웃나라와 한쪽은 자기보호를 위한 혐오를 퍼부어 대고, 또 한쪽은 저항적인 혐오를 퍼부어 댄다면 참으로 불행하고 딱한 일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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