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는 임진년 한일 경제전쟁

▲ 2011년 소재부품 부문의 대일적자폭은 150억7000만 달러 감소했다. 사진은 일본 바이어와 수출상담을 하고 있는 중소부품기업.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20년이 흘렀지만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전쟁 중이다. 바로 경제전쟁이다. 일본의 뒤를 꾸준히 뒤좇던 한국은 최근 들어 일본을 역전할 힘을 갖추기 시작했다.
국가신용등급을 앞서는가 하면 대일역조현상도 크게 완화됐다. 제2의 임진년 한일전쟁이 불붙고 있다.

임진년(1592년) 4월 한양 남산의 봉수대에서 큰 위기가 닥쳤다는 신호인 다섯 줄기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임진왜란이었다.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개전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의 완벽한 패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20년이 흐른 또 다른 임진년(2012년). 한국은 일본과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번엔 경제전쟁이다. 사실 20여년 전만해도 꿈도 꾸지 못할 전쟁이다. 1991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했다. 세계 시장 구석구석을 일본산 제품이 장악했다.

일본은 한국이 좇아가기조차 어려운 상대였다. 일본이 황새였다면 한국은 뱁새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도, 기업도 그랬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경제성장 모델의 원류는 ‘일본식 계획경제모델’이다. 현대차의 롤모델은 도요타, 삼성전자와 엘지전자는 소니•샤프 등의 경영전략을 모방했다.

뒤바뀐 한국과 일본의 위상


1991년을 기점으로 양국관계에 변화가 일었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들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버블붕괴로 자산가치가 급락했고 엔고현상으로 일본 수출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수익성이 저하됐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소니와 샤프는 해마다 적자를 기록했다. 품질의 대명사로 불리던 도요타는 작은 부품결함으로 흔들렸다.

국내기업은 달랐다. 삼성은 그 기간 일본 전자업계 전체 매출을 합한 것의 두 배가 넘는 매출을 올리며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타는 것만으로도 놀림 받던 현대차는 이제 세계 각국의 견제를 받는 명품 완성차업체로 거듭났다.

한일 무역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리나라의 수출 증가가 대일역조 확대로 이어지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대일본 부품소재 수입비중이 높은 우리나라는 그동안 수출이 증가할수록 공식처럼 대일 무역적자 폭이 커졌다. 특히 2010년 대일 역조는 361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우리수출은 사상 최초로 5000억 달러를 돌파했음에도 대일 적자가 전년 비해 65억 달러나 감소했다. 소재부품 부문의 대일적자폭도 15억7000만 달러 이상 줄었다. 대일적자폭이 15억 달러 이상 감소한 것은 2001년 이후 지난해가 처음이다.

올해는 역사적인 일까지 있었다. 국가신용등급에서 한국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아예 추월해 버린 것이다. 8월 27일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1’에서 ‘Aa3’로 한 단계 상향조정하고 등급전망을 ‘안정적’으로 부여했다.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바로 그 나라, 일본과 같은 신용등급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한지 열흘 만에 또 다른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기존 ‘A+’에서 ‘AA-’로 1단계 상향조정했다. 피치가 평가한 일본의 신용등급은 A+.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의 신용등급을 앞서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한국이 승리했다는 건 아니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우리나라는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 대일교역에서 2730억 달러의 누적 적자를 기록 중이다. 비중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수출용 소재와 주요 핵심부품을 일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소재부품산업의 대일적자는 전체 대일무역 역조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소재부품산업이 한일경제전쟁에서 경쟁우위를 갖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소재부품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액정표시장치(LCD) TV 패널에 들어가는 필름인 트리아세틸셀룰로스(TAC)필름, 반도체 제조용 금선의 대일 수입비중은 각각 99.5%, 83.2%에 이른다.

가장 큰 문제는 소재부품산업의 핵심원천기술 부족이다. 특히 핵심소재부문은 일본과의 기술력 격차가 심각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소재부품기획팀 이형석 선임은 “범용소재는 세계수준의 경쟁력을 갖췄지만 핵심소재는 선진국과 4~7년의 기술격차가 있다”며 “특히 반도체, LCD 등 IT 분야 핵심소재는 대부분 일본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부품소재의 수출이 중국에 편중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에서 대중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4.2%이지만 부품소재의 경우 36.3%에 육박한다. 이형석 선임은 “우리나라의 부품소재산업은 대일수입의존, 대중수출의존도가 높다”며 “특정국가의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는 해당 국가의 경기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최근 중국 경제 성장의 둔화가 부품소재산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유다.

소재부품산업의 대일역조 현상의 완화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의 역조현상 완화가 한국 소재부품산업의 기술력 향상이 아니라 일본 대지진의 영향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대지진으로 자국 내 특정 기업에게서만 부품을 공급받던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에 눈을 돌렸지만 일본 기업들의 생산능력이 정상화되면 다시 대일역조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제조업체들은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을 휩쓸다시피 하며 글로벌 소재•부품 공급망을 확대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기업의 해외기업 M&A 건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총 262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M&A에 쏟아 부은 자금규모도 전년 동기 대비 9% 늘어난 3조4909억엔에 달했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유럽 재정위기로 경쟁국의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반면 일본 기업들은 엔고현상과 저금리 기조를 십분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이처럼 대지진 이후 일본 기업들이 세계시장 점유율을 다시 확보하면 소재•부품 부문의 한일간 격차는 다시 커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한일전

정부가 소재부품산업이 향후 한일 경제전쟁의 승패를 가를 주요산업이란 것을 인식하고 꾸준히 육성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인 부분이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소재 부품 미래비전 2020’을 선포하고 오는 2020년까지 세계시장 독과점이 가능한 화학•섬유•금속•세라믹 등 4개 분야에서 30대 전략적 핵심소재개발에 나섰다. 세계시장규모가 각 3억달러 이상에 달하는 이들 분야에서 7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달성해 부품소재 세계 4강으로 발돋움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지식경제부 부품소재총괄과 이맹섭 주무관은 “그동안 소재부품산업은 정부 주도로 꾸준히 성장해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대일역조, 핵심소재 경쟁력 부족 등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선조는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통신사를 보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김성일은 이를 부정했다. 결국 눈앞의 적을 두고 당파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조선은 ‘왜(倭)’에게 일격을 당했다.

지금도 그럴 수 있다. 잠깐의 승리에 도취돼 방심한다면 다시 일본경제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은 순간이다. 준비가 필요할 때다. 율곡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처럼….
심하용 기자 stone @ thescoop.co.kr |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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