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파트1] 징벌배상 모의재판 참관기

▲ 9월 18일 열린 징벌배상 모의재판 현장. 선명산업(중소기업)은 스마트전자(대기업)에 하도급법상 기술유용과 납품단가 부당인하를 이유로 2587억원의 징벌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징벌배상(징벌적 손해배상) 모의재판이 9월 18일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렸다. 대기업인 스마트전자, 중소기업 선명산업은 모의재판 속 가상기업이지만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과연 누가 승리했을까.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은 중소기업에게 필요한 제도일까.

“배상액 2766억원이 무려 10억원으로 줄었다.” 징벌배상(징벌적 손해배상) 모의재판의 최종 판결 내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기업소송연구회는 9월 18일 여의도 한국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징벌배상 모의재판을 열었다. 대기업인 스마트전자, 중소기업 선명산업은 모의재판 속 가상기업이지만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선명산업은 스마트전자에 하도급법상 기술유용과 납품단가 부당결정으로 2587억원의 징벌배상소송을 제기하고, 고속전자에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법으로 179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소송 내용은 이렇다. 프린터 제조업체인 선명산업은 스마트전자와 1년 동안 물품 계약을 체결했다. 1년 뒤 연장 계약을 했다. 단 스마트전자는 조건을 달았다. 납품단가를 15% 인하달라는 것이었다.

“배상액 2766억원에서 10억원으로”

선명산업은 고민했다. 하지만 경쟁 중소기업인 고속전자가 무려 20% 인하된 가격으로 거래한다는 얘기를 듣고 공급처를 잃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스마트전자의 제안을 수락했다. 선명산업은 추후 납품단가 인상을 기대했지만 스마트전자는 시장가격 하락을 내세우며 또다시 30% 인하를 요구했고, 선명산업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스마트전자는 고속전자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고속전자가 납품하는 프린터의 기술이 자사(선명산업)의 기술과 똑같았다. 이상하게 여긴 선명산업은 수사기관에 고속전자의 압수수색을 요청했고, 과거 스마트전자에게 제출한 기술승인도 사진을 고속전자가 갖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 선명산업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내용은 이랬다. “납품단가가 15% 인하됨에 따라 영업손실이 205억원이 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규정에 따라 영업손실의 10배인 2050억원을 배상해달라.”

손해배상 청구내용은 또 있었다. “또한 기술유용행위로 손해를 입은 179억원의 3배인 배상금 537억원도 배상해달라.” 법에 따르면 기술유용행위로 손해를 입었을 경우 3배의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 이 모의재판은 전경련 주최로 열렸다. 재계의 메시지가 잘 드러났다. 스마트전자 측 변호인은 “대•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해야 한국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은 맞지만 대기업을 죽여야만 우리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대기업이 징벌적 손해배상에 따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국내 중소기업과 거래하기보다는 자체 생산하거나 해외 업체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또 납품단가 인하 없이는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펼치지 못해 대기업은 물론 물건 납품하는 중소기업 모두 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얼마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느냐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소송을 걸었을 때 중소기업이 이길 확률은 크지 않아 보인다. 소송에 들어가면 대기업은 대형 법무법인을 선정할 게 분명하다. 법무팀 역시 잘 정비돼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능력 있는 변호인을 선정할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다. 사내에 법무팀이 따로 있는 중소기업도 거의 없다.

실제로 이 모의재판에서는 대기업이 이겼다. 짐작 그대로다. 재판결과는 대기업인 스마트전자의 완승이었다. 2766억원의 배상을 요구했는데, 결과는 10억원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대기업의 압력으로 단가를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선명산업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술 유용 부분에서만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 “대기업의 고의적인 기술 유출이 아닌 과실로 인한 것”이라며 “연구비 50억원의 20%인 1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 제도의 실효성도 의문이다. 대기업의 눈치를 보며, 대기업과의 거래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징벌적 배상제도를 활용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름없다.

대기업은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을 바꾸면 그만이고, 원가를 절감해 큰 이익만을 창출하면 되지만 중소기업은 거래처를 잃는 순간 그대로 ‘끝’이다. 업계에서 한순간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기업과 한 번 마찰을 일으키면 다른 대기업과도 거래하기 힘들다.

선명산업 측 변호인은 “중소기업은 소송 한 건으로 공급처를 잃고, 회사는 한 순간 무너진다”며 “중소기업 대표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풍비박산난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소기업이 대기업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격”이라며 “선명산업 역시 같은 상황(수퍼 갑甲 vs 을乙)으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지만 중소기업을 대표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법안 중 하나로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징벌배상제도는 지난해 ‘하도급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대기업의 불공정거래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이 법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해 얻은 이익의 3배까지 손해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소기업, 소송 아닌 거래관행 개선 원해

국회에는 한층 강화된 징벌배상제도 법안도 계류돼 있다. 이 법안들은 기술유출뿐 아니라 부당한 단가인하 이른바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에 대해서도 대기업이 최대 10배까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모의재판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선명산업 측 변호인은 “손해발생액만을 배상하도록 규정하는 것은 원사업자의 위법행위를 방지할 수 없다”며 “업계에 만연한 부당한 하도급 금액의 감액행위를 막기 위해선 징벌적 효과가 충분한,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금액으로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스마트전자 측 변호인은 “배상액을 손해발생액의 10배로 정하는 것은 과한 측면이 크다”며 “단가 인하 등 징벌배상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소송 남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선명산업) vs 대기업(스마트전자) 형식으로 진행된 징벌배상 모의재판.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한 재판이었지만 이 제도의 문제점인 ‘중소기업이 이 제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이유’를 되새길 수 있는 자리였다. 징벌적 배상제도. 겉으론 효과적일 수 있지만 뜯어고쳐야 할 게 많다. 단점을 메우지 못하면 ‘포퓰리즘’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중소기업이 원하는 일은 소송을 통한 사후규제가 아니라 사전적으로 거래관행을 개선하는 것이다.
박용선 기자 brave11 @ thescoop.co.kr|@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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