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총론] 징벌적 배상제 실효성 논란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복잡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과 선거, 그리고 경제민주화 이슈까지 결합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를 없애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사후적 징벌형태인 하도급법 개정안이 순기능을 발휘할까에 대해선 물음표가 찍힌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딱딱한 사전적 의미는 잠시 접고 최근 통용되는 민주화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강자•약자 구분 없는 기회의 균등’, ‘합리적인 룰을 통한 공정한 경쟁’ 등으로 압축될 듯하다.

최근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경제민주화에서 특히 부각되는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다. 그간 대기업과 협력업체인 중소기업 간 있어온 힘의 불균형은 여러 문제를 야기해왔다. 대기업에서 기술을 침탈하고 부당하게 대금을 감액해 왔다는 것이 중소기업 측 주장이다. 중소기업 관련 단체와 시민단체는 이에 대해 오랫동안 부당함을 호소해 왔다.

사후약방보다 거래관행 바꾸는 게 먼저

급기야 정치권이 움직였다. 지난해 3월 ‘징벌적 손해배상제’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됐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이나 특허를 침해했을 경우 징벌적 차원에서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해야 하는 제도다.
그런데 기술침해는 중소기업이 당하는 피해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 부각됐다. 배상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선거철을 맞아 이슈를 찾던 정치권의 움직임과 맞물렸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확대적용은 급물살을 탔다.

확대된 개정안의 내용은 기술침탈 외에도 ‘부당한 대금결정’이나 ‘대급감액’이 이뤄질 경우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 A가 중소협력사 B와의 거래 중 납품단가를 200억원 가량 부당하게 깎았다면, A는 B에게 최대 20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

입증책임 역시 대기업이 져야 한다는 점이 색다르다. 중소기업에서 “우리가 이만큼 손해를 봤다”고 입증해야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에서 “우리가 이렇게 피해를 안 줬다”는 걸 밝혀내야 배상책임을 피할 수 있다. 대기업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제도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절대적 우위에 있고 그간 중소업체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대기업이 일정부분 양보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올 5월 말 새누리당 진영 의원을 시작으로 9월 초 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과 새진보정당추진회의 노회찬 의원까지 징벌적 배상과 관련한 ‘하도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기업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징벌적 배상제를 무리하게 도입할 경우 중소기업 측에서 일단 소송부터 제기하는 ‘소송남발’이 우려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경련 관계자는 “납품단가 협의 과정 중 ‘무리하게 대금을 깎았다’는 소송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대기업에서 기존 중소기업과 거래를 끊고 새 기업과 거래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런 경우 업체끼리 장기간 거래관계가 유지되지 못해 결과적으로는 중소기업도 손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안을 추진 중인 정치권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골목상권 침투’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국민의 비판을 받아온 대기업에서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징벌적 배상제를 강조해 온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은 “일반적인 제도와 법적용을 통해 (대기업을) 제어하려 노력했지만 잘 안됐다”며 “이런 급진적인 제도의 도입 없이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을 제출하기에 이른 것”이라 설명했다.

전경련은 기업소송연구회와 공동으로 9월 18일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징벌배상 모의재판’을 개최했다. 기술유용행위나 부당한 대금결정과 부당감액 등 대•중소기업간 거래에서 실제 발생할 수 있는 가상의 사례를 재판으로 구성했다.[※ 세부기사 35~36p] 행사를 주최한 기업소송연구회 측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판례위주의 영미법에 합당한 제도로 대륙법(성문법 근간)을 채택한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모의재판 시나리오를 작성한 기업소송연구회 전삼현 회장은 “약자인 중소기업의 편에 서려는 일반정서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법 적용은 ‘정서’가 아닌 ‘명확한 법리’에 의해 해야 하는 것”이라며 “ 「실손해 배상의 원칙」 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 대륙법 체계 상 손해액의 10배를 징벌적으로 배상하는 제도는 무리한 법적용”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전 회장의 설명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관계자는 “한국이 대륙법의 체계를 취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근래 들어 영미법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고 판례도 중요해지는 추세”라며 “현 상황에 맞는 법적용을 하면 그만인 것이지 (대륙법의) 원칙에만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포퓰리즘인가 경제민주화인가

현재 돌아가는 모양새는 대기업에 유리하지 않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9월 18일 있었던 대기업 CEO와의 간담회에서 “부당한 단가인하와 구두발주, 단가 후려치기 등에 적극 대처하고자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노회찬 의원은 9월 6일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불공정하도급 거래의 실질적인 근절을 위해서는 하도급법 위반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조치와 함께 중소기업 단체와 노동조합에게 고발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정관계의 움직임이 ‘지나친 포퓰리즘’이라는 지적도 일고 있다. 불공정행위가 판을 치는 거래과정부터 손을 보는 게 순리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강도 높은 징벌적 배상제도가 도입돼도 대기업에게 중소기업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기업에 한번 찍히면 거래관계가 영원히 끊길 수 있어서다.

대기업 역시 징벌적 배상제도를 두려워할지 의문이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아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 수 있다면 소송을 불사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들에겐 소송 ‘드림팀’을 만들 수 있는 실탄이 충분하다. 기업소송연구회는 “지난해 3월 기술침탈과 관련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실시된 이후, 그와 관련된 소송은 1건도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 기업소송연구회 측은 “대기업에서 기술침탈의 당사자로 지목되는 걸 꺼린 나머지 좋은 기술을 보유한 중소업체와의 거래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 원인”이라며 “이런 일이 계속되면 결국 경제활동의 위축을 불러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Issue in Issue | 미국의 엄한 징벌적 손해배상

미국 포드자동차는 자사 자동차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40대 여성에게 총 3억6900만 달러(약 4200억원)를 배상했다. 2001년 1월 있었던 사고 당시, 자동차는 4바퀴 반을 돌아 멈춰 섰다. 여성은 하반신 불구가 됐다. 사고여성은 포드자동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심 재판 배심원단은 배상금 1억2260만 달러 외에 징벌적 손해배상금 2억460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 새누리당 진영 의원(오른쪽)은 징벌적 배상제의 확대 개정안을 가장 먼저 발의한 정치인이다.
유럽 최대 은행인 UBS에 제기된 성차별 손해배상청구 사건도 유명하다. 전직 여성영업사원이었던 A씨는 직장 내 성차별로 피해를 입었다며 UBS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005년 뉴욕법원은 UBS에 대해 910만 달러(약 100억원)의 보상적 배상금과 2020만 달러(약 230억원)의 징벌적 배상금을 부과했다.
맥도널드 사건도 유명하다. 한 할머니가 49센트에 구입한 뜨거운 커피에 화상을 입었다. 의외로 화상부위가 컸다. 치료비는 1만 달러에 육박했다. 이 사안에 대해 배심원은 치료비 외에 징벌적 손해배상금으로 270만 달러(약 30억원)를 인정했다.

1998년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성희롱사건도 있다. 미쯔비시 자동차 제조공장에서 집단 성희롱 사건이 있었고, 고용평등위원회(EEOC)는 300명의 피해 여성을 대신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미쯔비시 측에선 성희롱은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연방법원은 피해여성들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미쯔비시사는 3억4000만 달러(약 3870억원)의 징벌적 배상액을 지불해야 했다.
유두진 기자 ydj123 @ thescoop.co.kr |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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