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헤이트풀 8(Hateful 8) ❹

영화 ‘헤이트풀 8’ 스토리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인 데이지가 있다. 데이지라는 소박한 꽃 이름과 자그마한 체구의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어울리는 것은 거기까지만이다. 데이지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현상금 사냥꾼에게는 로또나 다름없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흉악범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적 강자들과 평등하게 대하는 평등은 모두 불평등이며 폭력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적 강자들과 평등하게 대하는 평등은 모두 불평등이며 폭력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현상금 사냥꾼 루스(커트 러셀)는 마치 바다의 로또 밍크고래 한 마리를 횡재해 끌고 가듯 데이지를 호송한다. 천하의 흉악범이지만 루스에게는 금덩이만큼이나 소중하다. 데이지의 동료들이 언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몰려올지도 모르고,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이 이 금덩이를 가로채려 들지 모를 일이다.

마치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이 핵무기 발사장치 ‘블랙박스’를 아무에게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 24시간 손목에 수갑으로 채워 연결하고 다니듯, 루스는 자신의 손목과 데이지의 손목을 수갑으로 채워 연결하고 데이지와 샴쌍둥이 같은 기묘한 동행을 한다. 

현상수배범을 죽여서 데려오든 산 채로 데려오든, 현상금 사냥꾼이 받는 보상금은 같은데도, 루스는 데이지를 죽여서 데려가면 ‘신선도’가 떨어져 제값을 받기 힘들기라도 하는 듯 고집스럽게 행동한다. 데이지를 ‘활어’처럼 산 채로 데려가려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루스는 자신이 붙잡은 범죄자가 사람들 앞에서 목이 매달리는 것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뿌듯해지는 성격의 소유자다. 아마도 루스가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처럼 ‘운반’이 편하게 사냥한 범죄자를 죽여서 ‘가지고’ 갔다면, 이 영화의 요란한 잔혹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데이지가 루스를 조롱할 때마다 루스의 무자비한 폭력이 데이지에게 가해진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데이지가 루스를 조롱할 때마다 루스의 무자비한 폭력이 데이지에게 가해진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루스가 데이지를 호송하는 과정에 조금은 보기 힘든 장면들이 연출된다. 루스는 데이지를 누구에게도 탈취당하지 않고 산 채로 데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 자신이 데이지를 대하는 태도는 가히 무지막지하다. 데이지가 탈출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루스에게 저항하거나 적개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루스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른다.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을 구하러 들이닥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인지 데이지는 눈길에 여행이라도 나선 것처럼 태평하다. 가끔씩 루스를 조롱할 뿐인데, 그럴 때마다 루스의 짧고 강렬한 폭력이 데이지에게 가해진다.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UFC 경기에서나 나올 법한 벼락같은 팔꿈치 공격이 전광석화처럼 가해지고, 데이지 얼굴만 한 주먹이 그녀의 얼굴에 ‘끊어치기’로 작렬한다. 코피가 터지고 앞니가 통째로 사라지고 유혈이 낭자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행사 장면은 보기에 무척이나 생경하고 불편하다. 마지막에 루스를 살해하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데이지는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인 흑인 워렌 소령(새무얼 L. 잭슨)과 보안관 취임 예정자인 매닉스에 의해 미미네 잡화점에서 목이 매달린다. 

마치 중국의 철천지원수인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국공합작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듯 견원지간이었던 흑인과 백인이 마침내 하나가 돼 벌이는 일이 기껏 여자 하나 목매다는 일이다. 흑백의 두 남자가 힘을 합쳐 여자 하나를 목매달고 희열에 들뜨는 모습 또한 왠지 모르게 조금은 ‘가관’이다. 

‘완전한 평등’이야말로 ‘완전한 불평등’이며 가장 난폭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사진=뉴시스]
‘완전한 평등’이야말로 ‘완전한 불평등’이며 가장 난폭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사진=뉴시스]

어쩌면 성별에 상관없이 중범죄자를 평등하게 다루는 방식이 ‘진정한 평등’의 실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현상금 사냥꾼 루스야말로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일 수도 있다. 루스는 결코 데이지가 여자이기 때문에 더 가혹하게 대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여자라고 특별히 대접해주는 것도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평등하게’ 무지막지하게 대할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관객으로서는 그런 ‘기계적 평등’이 보기에 불편하다. 여자를 여자로 대하지 않고 남자와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이 불편한 모양이다. 

‘완전한 평등’이야말로 어쩌면 ‘완전한 불평등’이며 가장 난폭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게 군복무도 하고 야근도 하라’든지 ‘남자도 여자와 평등하게 가사일을 하라’든지, 이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그처럼 난폭하고 불평등하게 들리는 주장들도 달리 없다. 

어디 그 함정이 남녀평등의 문제뿐이겠는가. 노인과 어린아이를 청장년과 평등하게 대하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적 강자들과 평등하게 대하기도 한다. 그런 평등은 모두 불평등이며 모두 폭력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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