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식 대책이 화 불렀다

정부가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원인 조사결과와 함께 안전강화 대책을 내놓은 지 석달 만에 3건의 ESS 화재가 발생했다. 업계는 또다시 위축됐다. 발주가 줄어들 게 뻔해서다. ESS 운영업자들도 불안하다. 정부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ESS 화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그 답을 찾아봤다. 

정부가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 3건의 ESS 화재가 추가로 발생했다.[사진=뉴시스]
정부가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 3건의 ESS 화재가 추가로 발생했다.[사진=뉴시스]

“ESS 안전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지속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 지난 6월 1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ESS 사고원인 조사결과 및 안전강화 대책(이하 ESS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다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석달도 못 가서 허언이 됐다. 안전강화 대책 발표 이후 지금까지 3곳의 ESS 설비에서 추가로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월 평균 1곳에서 화재가 난 셈인데, 대책 발표 전인 2017년 8~올해 5월 22개월간 23개 ESS 설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재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정부 대책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거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안전강화 대책이 진행되는 와중에 문제를 안고 있던 ESS 설비에서 화재가 났다고 볼 수도 있어서다. 문제는 정부가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점검주기를 줄이고, 특별점검을 수시로 진행하기로 했다는 거다. ▲보호장치 설치 의무화 ▲설비 간 이격거리 확보 ▲과충전 방지장치나 비상정지장치 설치 등 ESS 재가동을 위한 전제조건도 숱했다. 변명을 수긍할 여지보다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비판할 요소가 더 크다는 얘기다. 

뭐가 잘못된 걸까. 애초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지적이 많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마련된 백화점식 대책이 화를 불렀다는 거다. 지난 6월 정부가 발표한 ESS 안전강화 대책을 되짚어 보자.

먼저 화재원인으로 꼽힌 것은 ▲전기적 충격(과전압ㆍ과전류) 시 배터리 보호시스템 미흡 ▲배터리 모듈 내 결로와 먼지 등 운영환경 관리 미흡 ▲배터리 보관 불량, 오결선 등 ESS 설치 부주의 ▲통합 시스템을 통한 ESS 설계ㆍ보호 미흡 등이다. 배터리 결함은 일부 있었지만 이로 인한 화재 발생 가능성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모든 화재 가능성을 사전에 단속하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과 시스템 안전관리 강화(제조기준) ▲옥외 전용건물 설치 유도와 안전장치 의무화(설치기준) ▲점검 강화를 통해 운영ㆍ관리 안전성 제고(운영ㆍ관리) ▲화재대응 능력 강화 기준 마련(소방기준) 등이다. 

종합해보면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 ESS 화재가 일어나니까 다 같이 조심하자’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통권342호 ‘화재원인 모호하고 숱한데… ESS 정말 괜찮나’라는 기사에서 정부 발표로 ESS의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업계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ESS 설치업체 관계자 A씨는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안전성 강화를 위해 애초부터 필요한 것들이었다”면서도 “하지만 향후 ESS 화재를 막을 대책이라고 하기엔 현실적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A씨가 소속된 ESS 설비업체는 배터리실을 한곳에 두지 않고 여러개로 분리해서 설치하는 자체 대안을 내놨다. 정부 대책의 허점을 민간기업이 스스로 메운 셈이다. A씨는 “비용은 더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면서도 “그렇게 해도 화재를 막는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 더 문제”라고 털어놨다. 

또다른 설치업체 관계자 B씨는 “정부 발표 후에 증권가와 일부 언론에선 화재원인이 다 밝혀지고 충분한 대책이 나와 불안감이 해소된 것처럼 얘기했지만, 업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ESS 시설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탓에 화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업체들까지 피해를 입고 있다. 이게 ESS 안전성을 강화해 산업을 키우겠다는 정부의 대책인지 의문이다.”


“원인 조사 미흡하다” 지적 많아

정부의 화재원인 조사 과정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전력시스템 전문가 C씨는 “정부 조사결과를 보면 화재원인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실험을 통해 입증하려 한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입증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ESS 설비 안에는 배터리의 상태를 측정하는 시스템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껏해야 온도, 스케줄 관리 정도다.”

그는 배터리는 완벽하다는 전제로 전력 제어만 이뤄지니까 변수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면서 주장을 이어나갔다. “배터리 제조사들이 업체에 요구하는 것도 온도를 몇도로만 유지하면 몇년간 몇 퍼센트의 충ㆍ방전 성능을 보장한다는 정도다. 자칫하면 화재가 날 수 있는 제품을 팔면서 주의사항이 온도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 효율성만 고려할 뿐 안전성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C씨는 그러면서 이런 대안을 내놨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을 만들어서 어떤 상황에서 배터리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 눈과 데이터로 확인하면서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배터리팩 제조업체 관계자 D씨는 이런 의견도 내놨다. “전기차나 ESS나 쓰이는 배터리는 똑같다. 하지만 자동차는 고출력을 내야 하니까 출력에 중점을 두고, ESS는 지속적으로 충전과 방전을 해야 하니까 출력보다는 안정성에 중점을 둬야 한다. 각기 다른 성능이 요구되는 시스템에 같은 배터리가 쓰이는 게 말이 되나. 문제를 거기서부터 짚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정부가 발표한 ESS 화재원인 조사결과에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앞으로 ESS 관련 정책을 펴는 데 있어 상당한 리스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 잘못 인정할 수 있나

더 큰 문제는 대책의 실효성이 의심 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가 별로 없을 거다는 점이다. 전력시스템 전문가 C씨의 얘기를 다시 들어보자. “정부는 지난해 11월에 ESS 사업장 전수조사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6개월이 넘도록 업계와 학계, 정부기관까지 총 동원해 화재원인 조사를 했고, 지난 6월 그 결과를 발표했다. 안전강화 대책은 이를 토대로 나왔다.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한 셈이다. 이제 정부는 뭘 해야 하는가.”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정부는 ESS 안전대책을 발표했지만 화재가 다시 발생했다. 조사가 잘못됐든, 대책이 잘못 나왔든, 대책 적용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든 뭔가 잘못을 인정해야 하지만 정부로선 그러기도 민망하다.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한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서다. ESS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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