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헤이트풀 8(Hateful 8) ❺

영화 ‘헤이트풀 8’의 개봉을 앞두고 타란티노 감독은 한 흑인 인권단체 집회에서 “나는 살인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 나는 살인은 살인이라 부르고, 살인자는 살인자라고 부른다”고 외쳤다. 흑인을 차별적 태도로 대하고, 흑인 범죄용의자를 향해 무분별하게 총질하는 미국 경찰을 향한 문제제기였다.

영화 속에서 현상금 사냥꾼은 ‘준공권력’이나 ‘준사법기관’에 가깝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우리는 은행에 돈을 신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국가에 신탁한 셈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타란티노 감독의 이런 발언은 미국 경찰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도발적이었다. 미국 경찰조직은 ‘100만 경찰’의 이름으로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 ‘헤이트풀 8’에 대한 대대적인 보이콧 운동을 펼쳤고, 이는 ‘헤이트풀 8’의 흥행 실패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잔혹한 복수극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경찰의 공권력에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은 다소 의외다.

미국 경찰단체의 반발에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이 ‘경찰 혐오자’는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영화 ‘헤이트풀 8’에는 분명 타란티노 감독의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비판적 시각이 녹아있다. 영화 속에는 2명의 ‘현상금 사냥꾼’이 등장한다. 현상금 사냥꾼의 지위는 다소 애매하다. 보안관과 같은 국가가 임명한 공권력이나 사법기관은 분명 아니다. 단지 보안관이 ‘법 집행’의 권한을 일부 위임한 ‘준공권력’이나 ‘준사법기관’에 가깝다. 

그러나 관아에 가면 정작 사또보다 이방 나부랭이들이 더 설치고 무섭듯, 보안관이 없는 현장에서는 현상금 사냥꾼이 공권력을 대표한다. 어쩌면 보안관보다 더 살벌하다. 백인 현상금 사냥꾼인 존 루스는 현상수배된 데이지를 붙잡아 끌고 가면서 기세등등하다. 조금만 의심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거침없이 장총을 들이대고 겨냥하며 신분을 확인한다. 혹한의 눈폭풍 속에서 자신의 마차를 모는 마부에게도 고압적이기 그지없다. 

영화 속에서 현상금 사냥꾼은 ‘준공권력’이나 ‘준사법기관’에 가깝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에서 현상금 사냥꾼은 ‘준공권력’이나 ‘준사법기관’에 가깝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눈과 추위를 피해 찾아 든 미미네 잡화점에서 존 루스는 자신의 현상범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총기를 회수하고 총알을 빼앗아 내다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엄연히 모든 미국인들에게 총기 휴대는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지만, 루스의 ‘준공권력’은 공권력을 집행한다는 명분으로 시민의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사실 루스는 현상금 사냥꾼 개인사업자에 불과한 ‘개뿔’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왠지 ‘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모양이다.

또다른 현상금 사냥꾼인 워렌 소령은 흑인이다. 아마 ‘평범한’ 흑인이었다면 백인들과 함께 미미네 잡화점에서 함께 눈보라를 피할 권리도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렌 소령은 흑인임에도 백인들에게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다소 거만할 정도로 당당하다. 미미네 잡화점에 모인 모든 백인들 역시 흑인 워렌 소령을 속으로 멸시하면서도 아무도 드러내놓고 경멸하지 못한다.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애매한 ‘사법기관’ 이름이 왠지 못내 부담스럽다. 

영국 법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 bes)는 국가의 기원을 “‘욕망은 끝이 없고, 이기적이고,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동등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는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가진 모든 무력을 ‘국가’에 맡기고 국가만이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군대와 경찰만 온갖 살상용 무기를 소유하고 우리 시민들은 식칼도 함부로 들고 돌아다니면 안 되게 된 이유다.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뒤집어질듯 요란하다. [사진=뉴시스]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뒤집어질듯 요란하다. [사진=뉴시스]

토마스 홉스는 여기에서 ‘신탁信託’이라는 말을 쓴다. 말 그대로 은행에 돈을 맡기듯이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은행에 돈을 신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국가에 신탁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공권력 앞에 서면 지은 죄도 없이 주눅이 들곤 한다. 국가가 믿음을 저버리면 우리는 대책이 없어지는, 대단히 무모할 수도 있는 신탁인 셈이다. 은행에 내 돈을 맡겨놓고 은행 앞에만 가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은행원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면 대단히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오래된 논란거리인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금방이라도 뒤집어질듯 요란하다. 나의 권리를 지켜달라고 내가 가진 권리와 권력을 검찰에 위임해 놓았더니 왠지 고용인이 나를 업신여기고 핍박하고, 내가 위임한 권력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듯해 못내 찝찝하다. 

은행에 맡겨놓은 돈은 내가 필요할 때면 대부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국가에 맡겨놓은 내 권리는 필요할 때 찾으려면 웬만해서는 내어주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건 사기에 가까운 거래다. 마치 맡겨놓은 돈 떼어먹은 부도난 은행에 몰려가듯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맡겨놓은 권리가 온전한지 불안한 시민들이 몰려가 검찰개혁을 외친다. 국가란 무엇이고 우리가 국가와 맺은 계약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오늘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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