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국산화에 숨은 문제

지난 9월 두산중공업이 개발 완료를 앞둔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을 공개했다. 현재 4개국에서만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데다, 부가가치도 크다. 안정성을 입증해야 하는 두산중공업은 테스트베드로 한국서부발전을 선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이라면 공기업이 민간기업의 ‘테스트베드’를 자처한 셈인데, 이거 괜찮은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신기술 딜레마를 취재했다. 

두산중공업이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의 국산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사진=두산중공업 제공]
두산중공업이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의 국산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사진=두산중공업 제공]

지난 7월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 사태가 터진 이후 화두로 떠오른 게 있다. 원천기술 국산화다. 해외기업 의존도가 높은 데서 수반되는 리스크를 원천기술의 국산화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였다.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을 중심으로 소재ㆍ부품ㆍ장비의 국산화에 관심이 쏠렸다. 최근엔 삼성ㆍLGㆍSK 등 대기업들이 국내 기술로 만든 소재ㆍ부품을 사용하면서 국산화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대감도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원천기술을 국산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건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업체만이 아니다. 두산중공업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이 회사는 지난 9월 19일 국산화를 앞둔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을 공개했다.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은 LNGㆍ복합화력ㆍ열병합발전 등 가스발전소에서 사용되는 내연기관이다. 신재생에너지가 주목을 받으면서 가스터빈의 가치도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는 미국과 독일, 일본, 이탈리아 4개국에서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두산중공업이 개발 중인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의 제조 공정률은 약 95%다. 두산중공업의 자체 성능시험만 통과하면 개발이 완료된다.[※참고 : 두산중공업은 2013년 정부가 추진한 ‘한국형 표준 가스터빈 모델 개발’ 국책과제에 참여해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개발을 이끌고 있다. 21개 국내 대학, 4개 정부 출연연구소, 13개 중소ㆍ중견기업과 발전사가 국책과제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ㆍ개발(R&D) 비용은 정부가 600억원, 두산중공업이 1조여원을 투자했다.]

두산중공업이 개발한 가스터빈이 불러올 경제적 효과도 상당히 크다. 두산중공업에 따르면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맞춰 오는 2030년까지 새로 건설할 신규 복합발전소의 규모는 약 18기가와트(GW)다. 여기에 들어갈 가스터빈을 국내 제품으로 대체하면 10조원대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외 시장까지 공략하면 연간 3조원가량의 매출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여기엔 큰 걸림돌이 하나 있다. 제품의 안정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방법은 크게 세가지다. ▲자체 테스트를 거치거나 ▲제3의 기관으로부터 인증을 받거나 ▲트랙레코드(제품이 실제로 사용된 실적)를 쌓는 것이다. 이중에서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건 트랙레코드다. 가령, 두산중공업의 가스터빈을 해외 시장에 내놓으려면, 실제 발전소에서 가동된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시장은 트랙레코드 선호

업계 관계자는 “정해진 기준이라는 건 없다”면서 “제3의 기관이 인증을 해줬든, 내부 테스트를 숱하게 거쳤든 고객이 쓰고 싶은 걸 쓰는 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만, 고객들은 (트랙레코드가 쌓인) 기존 제품이 있는 상황에서 위험 부담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트랙레코드가 쌓여있는 검증이 끝난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트랙레코드를 쌓으려면 고객이 제품을 직접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객이 위험을 무릅쓰고 검증되지 않은 국내 기술을 사용할 가능성은 낮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들이 기댈 곳은 공기업과 공공기관이다. 실제로 원천기술을 국산화하는 과정에서 공기업을 통해 실증과정을 거치는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LNG운반선의 핵심기술로 꼽히는 LNG화물창(배 안에 화물을 넣는 곳)이다. 

2004년 화물창 R&D에 착수한 한국가스공사와 조선3사는 10년 만인 2014년 국내 LNG화물창 설계기술인 ‘KC-1’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한국가스공사는 LNG운반선을 6척 발주해 그중 2척에 KC-1을 적용했다. 한국가스공사가 KC-1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참고 : 실제로 배를 발주한 건 한국가스공사와 가스운반 계약을 맺은 SK해운이다. 통상 해운사는 화주의 요구에 맞춰 배를 발주한다.]

 

하지만 여기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국내 기술을 실증하기 위해 기업과 공기업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불법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국내 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을 공기업이 검증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제도나 정책적 기반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가 민간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건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에 어긋난다. 업계 관계자는 “그뿐만 아니라 공개경쟁입찰을 피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수의계약을 체결하는 등 꼼수가 많다”고 지적했다. 

두산重 가스터빈, 서부발전이 실증

공기업에서 시험을 했다가 제품에 문제가 발생해도 골치가 아프다. 결함으로 인한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KC-1을 적용해 만든 2척의 LNG운반선은 첫 운항부터 말썽을 부렸다.

KC-1이 적용된 화물창에서 가스 누출, 결빙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수개월간 운항하지 못하면서 가스 운반을 맡은 SK해운에 큰 손실을 안겼다. 결국 두 선박은 조선소에 반환돼 여전히 수리를 받고 있다. 기존 기술을 적용해 배를 건조했다면 감수하지 않아도 됐을 리스크다.

국내에서 개발한 LNG화물창은 첫 운항에 결함이 발견됐다.[사진=뉴시스]
국내에서 개발한 LNG화물창은 첫 운항에 결함이 발견됐다.[사진=뉴시스]

두산중공업이 개발한 가스터빈도 한국서부발전이 2020년 착공하는 김포열병합발전소에서 실증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한국서부발전 관계자는 “두산중공업의 가스터빈이 쓰이는 건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협의 중이다”고 밝혔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국책과제에 가스터빈을 실증하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 해도 우려가 남을 수밖에 없다. 익명을 원한 한 전문가는 “혈세로 운영되는 공기업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민간기업의 이익을 위해 테스트베드를 자처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고 꼬집었다. 신기술 국산화에 숨은 딜레마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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