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무대삼아 바람을 노래하다
하늘을 무대삼아 바람을 노래하다
  • 이윤찬 기자, 오상민 사진작가
  • 호수 361
  • 승인 2019.10.3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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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오페라단 채관석 단장
채관석 단장은 거리의 예술가로 불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거리의 예술가로 불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유럽 성악가들과 ‘소리’로 경쟁했다. 이탈리아 피아첸자 국립음악원을 졸업했고, 독일에선 시립예술단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채관석(49) 부천오페라단 단장. 그의 노래를 들으려면 왠지 격식을 차리고, 값비싼 티켓을 끊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 편견이다. 채 단장은 ‘거리의 예술가’다. 공헌이란 뜻만 맞으면 옥상에서든 주차장에서든 노래를 부른다. 사회적 약자에게 위안을 선물할 수 있다면 연미복을 입는다.

그는 왜 꽃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한 걸까.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결핍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진짜 예술이죠. 클래식도 예외여선 안 됩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그를 만났다. 17번째 천막사진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음악 편이다.

채관석 단장에겐 하늘이 무대요, 땅이 관객이다.[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에겐 하늘이 무대요, 땅이 관객이다.[사진=오상민 작가]

# 1장. 냉정한 심판대

바람이 새벽녘 어스름을 걷어냈다. 살을 에는 겨울 유럽의 찬바람. 성악가(테너) 관석은 목이 신경 쓰였다. 2005년 2월 12일, 그에겐 중요한 날이었다. ‘독일 자르브뤼켄 시립예술단(극장)’의 오디션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컨디션이 좋아야 할 텐데….”
 
단원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예술단의 오디션은 냉정한 심판대다. 관객은 운 좋게 현혹해도, 단원의 귀까지 속일 순 없어서다. 한음만 틀려도 탈락이다. 한박자만 밀려도 고배다. 숱한 걱정이 관석의 몸을 휘감은 이유였다.
 
이윽고 자르브뤼켄 예술단. 132㎡(약 40평) 크기의 연습실에 단원 30여명이 모였다. 정갈한 양복을 입은 관석이 그들 앞에 섰다. 하얀색 형광등이 밝은 빛을 뿌렸다. 정적이 깔렸다.

채관석 단장은 냉정한 오디션을 거쳐 독일 좌르브뤼켄 시립예술단의 단원이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냉정한 오디션을 거쳐 독일 좌르브뤼켄 시립예술단의 단원이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고요함과 하이C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르려는 이도, 들으려는 이도 숨길을 다잡았다. 관석이 소리를 냈다. 오페라 파우스트의 아리아 ‘정결한 집’이 흘러나왔다. 많은 이들이 ‘3옥타브 도(하이C)’를 기대하는 난이도 높은 곡. 관석이 선택한 아리아였다. 고음을 여유롭게 쏟아내 발성이 완성됐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내 종반부. 아리아는 최고음을 향해 달려갔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리듬이 빨라지고, 호흡이 길어졌다. 드디어 절정. “~ 너의 순진하며 신성한 영혼의 존재가 느껴진다~.”
 
격정의 음이 춤을 췄다. 정적이 깨지고 공간이 흔들렸다. 그리곤 잔잔한 마무리. 고요함이 무겁게 깔렸다. 숨소리마저 허락지 않았다. 관석이 서서히 눈을 떴다. 단원들의 미소가 스쳤다. 먼발치에 앉아있던 지휘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우리가 원하던 목소리를 찾았습니다. 합격입니다.”
 
오후 2시, 관석은 예술단을 나섰다. 단원들이 포근하게 배웅했다. 저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넘실댔다. 관석의 마음도 리듬을 탔다.  

채관석 단장은 대가들도 힘겨워 한다는 하이C(3옥타브 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발성이 완성됐다는 뜻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대가들도 힘겨워 한다는 하이C(3옥타브 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발성이 완성됐다는 뜻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 3장. 넌 조수미가 아니야! 

관석이 처음부터 유럽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수원시립합창단(1996~2000년) 단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단했다. 맑고 깊은 소리를 인정받은 덕이었다.
 
관석에겐 오랜 꿈이 있었다. 유럽 유학이었다. 소리를 좀 더 가다듬고 싶었다. 유럽의 성악가와 경쟁하고픈 욕심도 있었다. 저변이 넓은 유럽 클래식(Classic) 문화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언젠가 먼 친척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클래식은 좀 어렵다, 왠지 격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요. 머리가 잠시 멍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클래식에 ‘심리적 거리감’을 갖고 있을까라는 질문 때문이었죠. 클래식이 삶과 가까이 있다는 유럽에서 그 의문을 풀어보고 싶었어요.”
 
입단 5년 차였던 2000년, 관석은 유학을 결정했다. 서른살, 더 미룰 수 없었다. 관석의 꿈을 알고 있는 아내는 말없이 믿음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현실을 차갑게 보라는 조언이 쏟아졌다.

“클래식은 클래식일 뿐 대중음악이 아니야. 유학 다녀와도 기회는 없을 거야. 알잖아. 누구나 조수미 선생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맞는 말이었다. 조수미처럼 솔리스트(Soloist)로 살아남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실력만으로 명성이 쌓이는 것도 아니었다. 살림도 넉넉지 않았다. 유학비용은 부족했고, 첫애는 이제 갓 한살이었다.

채관석 단장은 누구든 예술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스스로 클래식의 문턱을 낮췄다. 화려함을 버리고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누구든 예술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스스로 클래식의 문턱을 낮췄다. 화려함을 버리고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럼에도 관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작은 신념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하찮은 꿈은 없지 않나요? 운명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과 이루지 못할 사람을 정해놨을 리도 없고요. 전 그걸 믿었어요.”

2000년 2월, 관석은 이탈리아로 떠났다. 현실과 꿈을 이어야 할 책임은 관석에게 있었다. 무거운 짐이었다. 꿈의 무게였다.

# 4장. 망설임은 허세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유학을 가자마자 이탈리아 피아첸자 국립음악원에 입학했고, 5년 과정을 2년 만에 졸업했다(2002년). 이 과정을 관석만큼 빠르게 마친 유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연습벌레였다. 소리로 하루를 열고 닫았다. 콩쿠르 성적도 빼어났다. Citta Padova(2003년 7월 1위), Lario in Musica(2003년 10월 1위), Kaleidos(2004년 5월 특별상) 등 각종 국제콩쿠르를 휩쓸었다.
 
하지만 관석에겐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동양인 테너가 넘어야 할 벽은 두껍고 높았다. 졸업 후 3년 내내 그랬다. 답답했다. 실망과 아쉬움이 들끓어 속을 태우기도 했다. 독일에 있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 무렵(2005년 2월)이었다. “독일 자르브뤼켄 시립예술단에서 단원을 뽑고 있어. 오디션 한번 보면 어때?”
 
독일엔 도시마다 예술단이 있다. 독일 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 자르브뤼켄은 명성 있는 예술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관석으로선 이리저리 따질 필요가 없었다. 망설임은 허세였다. “오디션 보겠습니다. 노래는 ‘정결한 집(파우스트)’을 부를게요.”

채관석 단장은 이탈리아 피아첸자 국립음악원의 디플로미노 과정을 2년 만에 졸업했다. 이 과정을 그보다 빨리 마친 유학생은 드물었다. 채 단장이 유학 시절 연습했던 노래의 악보.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이탈리아 피아첸자 국립음악원의 디플로미노 과정을 2년 만에 졸업했다. 이 과정을 그보다 빨리 마친 유학생은 드물었다. 채 단장이 유학 시절 연습했던 노래의 악보. [사진=오상민 작가]

그는 대가大家도 힘들어한다는 고음(하이C)에 승부를 걸었다. “테너가 고음을 제대로 낸다는 건 발성이 탄탄하다는 의미예요. 자르브뤼켄 단원들에게 고음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죠.”
 
오디션에서 관석은 천상의 고음을 쏟아냈고, 입단이 확정됐다. 유럽에 유학 온 지 5년 만의 성공이었다. “2005년 5월 정식단원이 됐어요. 10여회에 걸쳐 수십명이 오디션을 봤는데, 이번에도 별로였으면 내정했던 사람을 뽑을 생각이었대요. 운이 좋았죠.”
 
원하던 솔리스트는 아니었지만 관석은 만족했다. 유럽 예술단의 단원이라니, 세상엔 역시 하찮은 꿈이란 없었다. 그제야 삶이 안정됐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도 독일로 건너왔다. 오후면 햇볕이 젖어 드는 관석의 집엔 웃음꽃이 흐드러졌다.

하지만 관석은 그때부터 ‘다른 곡조曲調’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잘 모르는 억센 물결 같은 삶이었다. 

채관석 단장은 어떤 무대에서든 혼신의 힘을 쏟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어떤 무대에서든 혼신의 힘을 쏟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 5장. 그때의 꿈, 그때의 소리 
 
“휘이~.” 찬바람이 낡은 성당에 내려앉았다. 관석은 목도리로 몸을 감쌌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날을 세운 바람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후배들 걱정에서였다.
 
며칠 전이었다. 한 대학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유럽에 온 지 8년여 만이었다. “카펠라 합창단이 유럽에서 공연을 해요. 독일도 갈 것 같고요. 그때 뵐 수 있을까요?” 카펠라 합창단, 관석의 대학 시절 동아리였다. 설렜다. 그때의 꿈, 그때의 소리가 밀려오는 듯했다.
 
2008년 1월, 카펠라 합창단의 독일 공연은 오래된 성당에서 열렸다. 뒤쪽에 자리를 잡은 관석은 눈을 감았다. 단원들이 소리를 모았다. 소프라노의 산들바람 같은 소리가 퍼졌다. 
잔잔함이 물결치자 테너가 음을 섞었다. 성당의 둥근 지붕을 타고 소리가 풍부해졌다. 간혹 소리가 다투듯 부딪치기도 했지만 나무랄 데 없었다.
 
관석의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연신 미소를 머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온 손주들도 고사리손으로 장단을 맞췄다. 낡은 성당에서 열린 낯선 공연이었지만 감동이 굽이쳤다.

채관석 단장은 꿈의 합창단과 함께그린 합창단을 지휘한다. 음악 동호회 회원들과도 예술로 교류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꿈의 합창단과 함께그린 합창단을 지휘한다. 음악 동호회 회원들과도 예술로 교류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함께그린 합창단 단원이 채관석 단장의 지휘에 맞춰 화음을 맞추고 있다. 누구든지 쉽게 예술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 채 단장의 생각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함께그린 합창단 단원이 채관석 단장의 지휘에 맞춰 화음을 맞추고 있다. 누구든지 쉽게 예술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 채 단장의 생각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 6장. 할머니의 꼬깃꼬깃한 지폐
 
마지막 곡이 끝났다. 감동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던 한 할머니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소박한 옷을 입은 할머니였다. 

헌금함 앞에 도착한 할머니는 꼬깃꼬깃한 5유로(Euro) 지폐 한장을 봉헌한 뒤 단원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잘 봤어요, 수고했어요.” 고마움의 인사였다. 할머니에게 클래식의 문턱은 없었다. 고상함도 필요 없었다. 클래식은 담담한 삶일 뿐이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관석은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클래식은 어렵다”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던 먼 친척의 얼굴이 오버랩된 탓이었다. 관석은 고개를 둘러 주변을 살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보였다.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공연을 본 것 같은 아줌마도 눈에 들어왔다. 오페라의 음을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별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일상日常이었다.

채관석 단장이 부천오페라단의 리허설을 바라보고 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연습시간이 충분하지 않아도 채 단장은 미소를 잃는 법이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이 부천오페라단의 리허설을 바라보고 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연습시간이 충분하지 않아도 채 단장은 미소를 잃는 법이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클래식은 삶이자 사람이다.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음악이 아니다. 클래식은 공공公共을 위한 것이다.” 그날밤, 관석은 아내와 마주 앉았다. 유학을 결심했던 8년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 관석이 어렵게 입을 뗐다. “이제야 자리를 잡았는데….”

아내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관석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 들어갔으면 해.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아내는 이번에도 말없이 믿음을 보냈다. 자르브뤼켄 예술단원들의 반응은 당연히 달랐다. “왜 그러느냐” “한국에서 좋은 제안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쏟아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다”고 답하면 ‘거짓말 말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유럽에서 8년간 느꼈던 걸 한국에서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예술의 공공성이었다. 어쩌면 소명의식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2008년 7월, 관석과 가족들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실과 꿈을 이어야 할 책임은 이번에도 관석에게 있었다. 무거운 짐이었다. 현실의 무게였다.

채관석 단장은 클래식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많은 걸 버렸다. 양말을 벗은 채 단장이 자유로워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클래식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많은 걸 버렸다. 양말을 벗은 채 단장이 자유로워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 7장. 편견과 고정관념 

채관석 부천오페라단 단장은 성악가(테너)다. 이탈리아의 피아첸자 국립음악원을 졸업했다. 독일 자르브뤼켄 시립예술단에선 정식단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려면 왠지 격식을 갖추고 고상함으로 치장해야 할 것 같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채 단장은 모두를 위해 노래한다. 하늘이 무대요, 땅이 관객이다. 바람이 소리요, 별이 리듬이다. 
그가 설립한 부천오페라단(2010년)은 마을기업(일종의 사회적기업)이다. 공헌이란 뜻만 맞으면 강당에서든 옥상에서든 주차장에서든 공연한다. 역 앞도 좋고, 공원도 좋다.

개런티도 개의치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연미복을 입는다. 공연만이 아니다. 부천생활문화협동조합(부이사장)과 부천생활문화페스티벌 다락(자문위원)을 통해 음악 동호인과도 교류한다. 노래든 악기든 배움을 원하면 언제든 환영이다. 

채관석 단장은 ‘공헌’이란 뜻만 맞으면 어디서든 공연을 한다. 옥상이든 주차장이든 역 앞이든 상관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공헌’이란 뜻만 맞으면 어디서든 공연을 한다. 옥상이든 주차장이든 역 앞이든 상관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는 왜 이런 길을 걷는 걸까. “예술(음악)은 특별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도구가 아니에요. 아픈 사람들, 결핍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진짜 음악이죠. 클래식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채 단장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스스로 거품을 빼야 했고, 문턱도 낮춰야 했다. 클래식은 고고高高하고 어려운 음악이란 고정관념과도 맞서야 했다.
 
다시 2008년 7월, 한국행 비행기. 관석이 눈을 떴다. 아내와 아이들은 긴 잠에 빠져 있었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짙은 어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잘할 수 있을까.” 창밖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의 미래도 칠흑 같았다

채관석 단장이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연미복을 가다듬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이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연미복을 가다듬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 8장. 환상과 착각  

한국에 들어온 지 2년여 만인 2010년. 관석은 부천오페라단을 설립했다. 공연‧강의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탈탈 털어 넣었다. 유럽에서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하면 대중이 반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관석이 창단공연(2011년)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던 이유였다.
 
‘착한 홍보’도 많이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기만 하면 되니 편하게 오시라’고 했다. 먼 친척에게도 ‘지루하지 않을 테니 관람해 보시라’고 권했다.

기대대로였다. 첫 공연은 대단했다. 좌석을 꽉 채운 관람객들은 갈채를 보냈고, 관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행복했다. 공중파 방송사가 촬영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채관석 단장이 설립한 부천오페라단은 대중이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놀이터 앞도, 공원도, 병원도 그들의 무대다. [사진=부천오페라단]
채관석 단장이 설립한 부천오페라단은 대중이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놀이터 앞도, 공원도, 병원도 그들의 무대다. [사진=부천오페라단]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화려함은 일순간 사라졌다. 섭외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섭외가 들어오더라도 ‘오페라는 너무 어렵다’ ‘대중성이 없다’는 쓴소리만 되돌아왔다. ‘편하게 오세요’라고 권유하면 대중이 응답할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자 환상이었다.
 
여긴 유럽이 아니었다. 한국의 대중은 클래식의 높은 문턱에 ‘무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2011년 겨울은 관석에게 혹독했다. 지독한 찬바람은 희망 따윈 전하지 않았다.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불면의 나날이었다.

# 9장. 찾아가는 오페라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지 않는다.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판다.” 
- 미 사회적기업 ‘루비콘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 -

“댕~댕~.” 벽시계가 공허한 소리를 냈다. 부천오페라단 사무실, 관석은 그날도 혼자였다. 침체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답도 없었다. 공연을 하는 것도, 오페라단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도 버거웠다. 음악으로 대중과 호흡하겠다는 꿈은 멀찌감치 밀려난 지 오래였다.

채관석 단장은 “꿈을 잊었다는 건 꿈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그가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늘 고민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꿈을 잊었다는 건 꿈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그가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늘 고민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때였다. 신문을 읽던 관석의 눈에 ‘기사 한줄’이 들어왔다. 사회적기업을 설명하는 기사였다. “…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팝니다….”
 
건조했던 그의 눈이 반짝였다. 낯선 내용이었지만 공감할 수 있었다. 관석에겐 이렇게 읽혔다. “음악을 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음악을 해야 한다.”
 
관석은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멋진 음악이 ‘선先’이 아니었다. 화려한 오케스트라도, 훌륭한 오페라단도, 값비싼 무대도 앞세워선 안 됐다.

클래식의 고고한 문턱을 허무는 게 먼저였다. ‘음악 들려드릴 테니 찾아오세요’가 아니라 ‘음악 듣고 싶으시면 찾아갈게요’가 답이었던 거다. 그게 바로 관석이 꿈꾸던 ‘예술의 공공성’이었다.
 
관석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당장 부천 사회적경제지원센터(현 사회적경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네, 부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입니다.” “전 채관석이란 사람입니다.” 
관석은 마음이 급해졌다.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찾아가는 오페라, 그래! 그거였다.

채관석 단장은 ‘먼저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격식은 겉치레일 뿐”이라고 말했다. 채 단장이 합창단원들과 책상을 옮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은 ‘먼저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격식은 겉치레일 뿐”이라고 말했다. 채 단장이 합창단원들과 책상을 옮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 10장. 편견과의 담판 

“똑똑똑!” 관석이 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문을 열었다. 관계자 4명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졌다. “사회적기업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센터 관계자 : “앉으세요, 아까 오페라단을 운영한다고 하셨나요?” 
관석: “네, 오페라단 단장입니다.” 

센터 관계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거부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사회적기업은 고고한 분야가 아닙니다. 오페라와는 영역이 완전히 달라요.”

어렵다, 비싸다, 돈 많은 사람이나 듣는 음악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일부는 편견이었지만 클래식이 스스로 쌓아 올린 ‘장벽’이기도 했다. 

채관석 단장이 공연 직전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부천오페라단은 늘 에너지가 넘친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이 공연 직전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부천오페라단은 늘 에너지가 넘친다. [사진=오상민 작가]

관석이 반론을 폈다. 편견과의 담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맞는 말도 있지만 오해도 있습니다. 예술은 공공의 영역입니다. 전 그걸 지향합니다. 공공성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를 부를 생각입니다. 클래식의 문턱이 높다면 낮추겠습니다.”
 
토론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보름이나 더 이어졌다. 다행히 긍정적인 변화는 있었다. 거부감을 드러냈던 센터 관계자들이 관석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중엔 센터장도 있었다. 조용히 경청만 하던 센터장이 입을 열었다.
 
“단장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오페라단이 왜 사회적기업이 돼야 하는지 공감합니다. 도울 수 있는 부분은 힘껏 돕겠습니다. 다만, 대중이 클래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각오했던 바였다. 관석도 ‘거품’을 뺄 준비가 돼 있었다.

대기실이나 분장실이 없더라도 채관석 단장은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대기실이나 분장실이 없더라도 채관석 단장은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11장. 거리의 예술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몇몇 단원은 불만을 내비쳤다. 취지는 알겠는데,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현실적인 비판이었다. 옥상은 뭐고, 강당은 뭐냐는 거였다.

관석은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의 영역이었다. 관석이 할 수 있는 건 먼저 실천하는 것뿐이었다.
 
보육원‧양로원‧암병동 등 관석의 노래를 원하는 곳이라면 흔쾌히 찾아가 오페라를 불렀다. ‘오페라가 너무 길다’는 말이 나오면 곡을 줄였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쓴소리를 들으면 설명을 따로 붙였다.

아이들을 위해선 한글 버전의 오페라를 만들고, 어르신을 위해선 춤을 넣기도 했다. 때론 대기실도, 분장실도 없었지만 관석은 정성을 쏟았다. 대중이 있는 곳이 관석의 무대였다. 

“클래식은 지루하고 어렵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채관석 단장은 이런 쓴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그가 오페라 중간에 춤, 해설 등 흥밋거리를 배치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클래식은 지루하고 어렵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채관석 단장은 이런 쓴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그가 오페라 중간에 춤, 해설 등 흥밋거리를 배치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쭈뼛대던 단원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몇몇 단원은 옥상에서 관석과 함께 오페라를 불렀다. 레퍼토리를 신명나게 만들어준 단원도 있었다. 

‘오페라야 놀자!’ ‘노래하는 마을, 우리들의 이야기’ 등 문턱을 낮춘 공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부천오페라단은 마을기업 인증을 받았다. 
그때부터 관석은 ‘거리의 예술가’로 불렸다. 그의 곁을 지켜준 대중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아름다운 앙상블이었다.

# 12장. 어느 고등학생의 고백 

“오페라도 정말 재미있네요. 다음에 또 공연 오실 거죠?” “다른 단체에 부천오페라단을 추천했어요. 음악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더니, 꼭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채관석 단장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부천오페라단의 공연이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진 덕분이다. 부천오페라단은 한해 30회가 넘는 연주회를 갖는다. 사회공헌 성격의 공연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더 많다.
 
문턱을 낮춘 공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 100년 미래시민콘서트’ ‘안중근 의거 100주년 콘서트’ 등 채 단장이 기획한 큰 공연도 숱하다. 
“제가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예술은 대중의 것이고, 전 예술을 전달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지난 9월 30일 열린 ‘시인 변영로’를 기리는 연주회의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 9월 30일 열린 ‘시인 변영로’를 기리는 연주회의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부천오페라단의 공연은 재미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공연을 보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행복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부천오페라단의 공연은 재미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공연을 보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행복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 9월 30일, 부천오페라단은 ‘시인 변영로’를 기리는 연주회를 열었다. 우리동네예술프로젝트 공모사업의 일환이었다. 채 단장은 기획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연주회가 끝난 뒤 밤 9시께. 30여명이 모인 리셉션 자리에 채 단장이 참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학생, 어린아이가 그를 에워쌌다.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에겐 문턱도, 벽도 없었다.
 
그때 한 고등학생이 채 단장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 채 단장이 눈인사를 하자 학생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실은요, 오고 싶지 않았어요. 재미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좋았어요. 또 올게요.” 가을바람이 리듬을 탔다. 별이 멜로디를 읊었다. 저 멀리 하늘이 무대를 열었다. 관석이 거기 서 있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채관석 단장의 꿈은 예술을 매개로 대중에게 행복과 웃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채관석 단장의 꿈은 예술을 매개로 대중에게 행복과 웃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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