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된 데이터 3법 국회 처리 약속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한국은 경쟁국보다 한발 앞서 정보통신망을 구축해 IT 강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AI정부를 표방한 지금은 후속조치를 소홀하게 다룬 탓에 IT 후진국으로 밀려나게 생겼다. [사진=연합뉴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한국은 경쟁국보다 한발 앞서 정보통신망을 구축해 IT 강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AI정부를 표방한 지금은 후속조치를 소홀하게 다룬 탓에 IT 후진국으로 밀려나게 생겼다. [사진=연합뉴스]

세계가 4차 산업혁명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건만 한국은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미래산업의 원유’로 불리는 데이터를 활용해 맞춤형 상품을 개발하거나 다른 산업과 융합해 혁신을 일으켜야 하는데 데이터 활용 자체부터 규제에 막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8년 8월 말 ‘데이터 강국’을 천명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판교 스타트업캠퍼스에서 열린 데이터경제 활성화 규제혁신 현장방문 행사장에서 “이제 대한민국은 인터넷을 가장 잘 다루는 나라에서 데이터를 가장 잘 다루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월 말에는 ‘인공지능(AI) 정부’를 만들겠다며 AI 분야를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정책 목표, 특히 데이터경제 의지는 강해 보인다. 그러나 그 실행에 필수적인 관련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1년째 잠자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 기업들이 갖고 있는 각종 데이터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ㆍ신용정보법ㆍ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지난해 11월 발의됐다.

데이터 3법 개정안은 개인정보의 비식별화가 핵심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ㆍ서비스 개발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가명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가명정보란 이름이나 연락처 등을 암호화해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여러 기관과 기업들이 보유한 데이터를 결합해 활용도가 높은 빅데이터를 산출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소비자는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 3법 개정안은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닥쳐 소관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 벽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기를 1년여,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은 다른 비쟁점 법안들과 함께 19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정보기술(IT) 업계 등 스타트업들이 잔뜩 기대했는데, 상임위 심사가 지연되면서 원내대표들의 약속마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데이터 3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사이 한국의 신산업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허브 수준을 측정하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서울은 올 9월 기준 36위에 그쳤다. 순위가 가장 높았던 2015년 9월에 비해 4년 사이 30계단 추락했다(영국 컨설팅그룹 지옌 분석).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지난해 빅데이터 활용 역량을 조사한 결과에선 63개국 중 31위였다.

경쟁국들은 이미 개인정보 관련 규제 빗장을 풀어 활발한 공유와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부터 개인정보를 어떻게 다룰지 규정한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을 시행 중이다. GDPR은 상업적 목적 등 모든 연구에 가명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4년 전 익명 가공정보 개념을 도입한 일본이 지난해 GDPR의 적정성 평가를 통과해 EU와 세계 최대 개인정보 벨트를 구축했다. 

일본 기업들은 유럽국가의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데 따로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개인정보를 활용할 길이 막혀 있어 GDPR 심사 문턱을 넘기 어렵다. 이대로 가다가는 EU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일본에 밀려날 것이란 우려가 터져 나온다.

구글과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기술을 기반으로 IT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네이버 라인과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야후재팬이 경영통합에  합의한 배경 중 하나도 양국의 AI 기술을 합쳐 글로벌 AI 기업과 맞서 싸우자는 것이다. 

 

한국은 외환위기 때 전국적 정보통신망을 경쟁국들보다 앞서 구축한 덕분에 IT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런데 지금은 구호로만 ‘데이터경제’ ‘AI 정부’를 외칠 뿐 후속 조치-관련 규제 완화 및 제도 정비, 법률 제정과 개정-를 소홀히 하거나 이해집단과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해 지연시킴으로써 IT 후진국 내지 속국으로 밀려나게 생겼다.

세계가 빠른 속도로 데이터경제로 진화하고 있다. 경쟁국들이 IT는 물론 제조ㆍ금융ㆍ의료 등 산업 전반에 걸쳐 AI를 응용ㆍ접목한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AI 연구 과정에서 각종 데이터 활용은 필수다. 더 많은 데이터를 모아 써먹을 수 있어야 AI 연구를 활성화하고 앞서 나간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산업계가 데이터경제로 속도를 높여 달려가도록 정치가 판을 깔아줘야 한다. 데이터 3법 개정안 처리는 그 출발점이다. 가급적 11월 안에, 적어도 정기국회 폐회 이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부도 데이터경제 활성화를 가로막는 걸림돌 제거에 더욱 적극 나서야 한다. 더 이상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 같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양재찬 더스쿠프 편집인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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