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돗물 사태와 집단소송

인천시민이 둘로 쪼개졌다. ‘붉은수돗물’ 사태로 인한 시의 보상책 때문이다. 애꿎은 시민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지자체 보상금을 받고 시와 화해를 선택한 쪽과 소송을 통해 정당한 권리를 찾겠다는 쪽으로 갈라섰다는 거다. 보상금 규모 역시 소송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명백히 지자체의 실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다. 한국에도 미국과 같은 ‘집단소송’ 제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붉은 수돗물 사태와 집단소송을 취재했다. 

인천시는 적수 사태가 벌어지자 수질분석 결과가 적합하다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사진=뉴시스]
인천시는 적수 사태가 벌어지자 수질분석 결과가 적합하다며 시민들을 안심시켰다.[사진=뉴시스]

인천 서구 지역의 시민들은 최근 시가 보낸 한통의 공문을 받았다. ‘붉은 수돗물’ 사태 관련 피해보상 안내문이다. 총 4만1159가구에 평균 13만1500원의 보상금을 주겠다는 게 골자다. 시는 “‘생수구입비’ ‘정수기 필터교체비’ ‘수도꼭지 필터교체비’ 등에서 시중 최고가격을 적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보상을 둘러싼 지역여론은 긍정적이지 않다. 지난 5월 30일 불거진 ‘붉은 수돗물’ 사태의 파장이 그만큼 컸다. 당시엔 수도꼭지를 틀면 붉은색 입자가 섞여나왔다. 일회용 마스크로도 거를 수 있을 만큼 굵었다. 음용은커녕 생활용수로 쓰기에도 부적합해 보였다. 

시민들은 씻고 마시는 용도로 생수를 따로 구입했고, 이물질을 걸러줄 값비싼 필터를 위해 지갑을 열었다. 다른 지역의 집이나 숙박업소로 대피를 하는 시민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지자체는 “수질분석 결과가 적합하다”고만 알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붉은수돗물을 쓰며 공포에 떨던 시민들이 조사결과를 들을 수 있었던 건 20일이나 흐른 뒤였다. 이유는 ‘무리한 수계전환’이었던 것으로 그제야 밝혀졌다. 흐르던 물길의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물이 흘러 상수도관에 있던 내부침전물이 떨어져 나왔다는 거였다. 

수계전환을 할 땐 녹물이 쓸려나올 수 있으니 충분한 시간을 두고 배수하고 물의 흐름을 늦추라는 국가가 정한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결과였다. 수계전환을 하는 과정에서 수돗물의 탁도를 측정하는 탁도계를 일부러 끈 공무원도 있었다. 관재官災였다.

도시의 핵심 인프라인 수돗물이 오염됐으니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26만1000가구, 총 63만5000명이 5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67일간 적수에 시달렸다. 가구당 평균 13만원 수준인 보상대책이 미흡해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인천시는 생수구입비의 최대 보상가를 1일 2L로 제한했는데, 이는 1일 권장 음용량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 시민들을 구입한 생수를 마시는 데 뿐만 아니라 씻고 음식을 조리할 때도 써야 했다. 제품 구입비의 영수증만 보상근거로 삼겠다는 결정도 너무 일방적이라는 지적이다.

여론이 악화한 이유는 또 있다. 시의 보상대책은 ‘화해계약’이 전제로 깔려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보상금을 지급받을 경우 더는 민ㆍ형사상의 소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한다.” 시민들은 송사부터 틀어막겠다는 시의 의도를 괘씸하다고 여겼다. 보상결정을 신청한 가구가 전체 피해가구 중 15.7%에 불과했던 이유다. 이 때문에 시의 당근을 받는 대신 법정 싸움을 벌여보려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구 수돗물 정상화 주민대책위원회는 11월 21일 인천지방법원에 인천시를 상대로 적수 사태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제출했다. 지역주민 5333명이 참여하는 공동소송이다. 보상금을 최대한 받겠다는 취지로 소송을 벌이는 게 아니다. 청구금액이 1인당 20만원으로 많지 않은 게 그 근거다. 

대책위 관계자는 “3개월가량 붉은 수돗물 문제로 수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서구 주민들의 피해는 금액으로 산정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며 “이번 소송은 ‘잘못된 수돗물 행정’에 경종을 울리는 목적이 있어 청구금액을 제한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인근의 다른 지역 주민들도 따로 소송단을 꾸려 시와 법적대응을 준비 중이다. 

법정 다툼은 복잡한 양상을 보일 공산이 크다. 이들 단체는 각각의 시민들에게 일일이 등본과 가족관계 증명서, 피해 증명 서류 등을 모아야 했다. 재판이 지연될 경우, 이탈자가 속출할지도 모른다. 패소하면 지자체 보상마저 받을 수 없게 된다. 

참 애꿎은 일이다. 상수도 관리의 명백한 잘못으로 인한 피해라는 게 확인됐는데도, 누구는 보상금을 더 받고 누구는 덜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집단소송의 형태로 제기했다면 어땠을까. 집단소송이란 전체 피해자 중 일부가 승소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미국서 적수 사태 벌어졌다면…

미국은 이 제도가 가장 활성화된 국가로 꼽힌다. 미국에선 많은 피해자를 모집해 소송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같은 사건이라면 재판이 병합돼 하나로 진행된다. 법원은 전체 피해자의 손해를 여러 방법으로 산정하고, 피해자 집단이 승소하면 소정의 권리확인절차를 거쳐 배상금을 분배하게 된다. 피해자들은 일일이 증빙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없고, 재판부도 이를 하나하나 심리할 부담도 없다.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로 인해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배상금 지급판결도 가능하다. 집단소송 제도는 그만큼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 일반 시민도 월등한 힘을 갖고 있는 국가나 대기업을 상대로 다툴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이런 제도가 한국에도 있었다면, 애초부터 허술한 수돗물 관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에선 집단소송 제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국회서 관련 법안을 몇차례 발의했지만 폐기됐거나 계류 중이다. 이러니 애먼 시민들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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