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제도 필요한 이유

가습기 살균제 사건,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LG전자 건조기 논란 등 기업의 잘못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본 사례는 숱하다. 그때마다 기업은 대중 앞에서 고개를 바짝 숙였지만 뒤에선 ‘법대로 하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집단소송제가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소비자의 아우성과 기업들의 악어의 눈물을 취재했다.

기업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를 구제하기 위해 집단소송제가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사진-=연합뉴스] 

#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 20일 LG전자가 판매한 의료건조기를 구매한 고객에게 1인당 1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7월 LG건조기의 콘덴서가 자동세척되지 않는다는 민원이 빗발친 지 4개월 만이다.[※참고: 콘덴서는 의류 건조 시 발생하는 증기를 물로 바꿔주는 부품이다. LG전자는 광고를 통해 3개의 물줄기가 1회 건조당 1~3회 자동세척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소비자원의 분조위 결정으로 LG전자의 광고만 믿고 건조기를 샀다가 손해를 입은 소비자가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소비자와 LG전자 양측이 분조위의 결과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LG건조기를 구입한 소비자는 무상수리나 위자료가 아닌 환불·교환을 원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LG전자도 마찬가지다. 분조위를 신청한 소비자는 247명에 불과하지만 2016년부터 판매한 문제 건조기가 145만대에 달하기 때문이다. 모든 소비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경우, 145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해야 한다. 게다가 분조위의 조정 결과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LG전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 2014년 1월 1억4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건이 터졌다. 고객의 개인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카드사(KB국민카드·NH농협카드·롯데카드)의 탓이었다. 신용카드3사는 대국민 사과까지 하며 고객 앞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정보유출에 관한 피해보상은 없었다.

그러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카드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공동소송이 이어졌다. 지루한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카드사에 정보유출로 입은 소비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놨다. 2014년 소송을 제기한 이후 5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름·주소·주민번호·휴대전화번호 등 19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소비자가 받을 수 있는 배상금액은 고작 10만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배상을 받을 수 있는 피해자는 1억400만명(중복포함) 중 소송을 제기한 17만명(0.16%)밖에 되지 않았다.

# 8월 시중은행이 판매한 파생결합펀드(DLF) 대규모 손실 사태가 발생했다. 원인은 실적에 눈이 먼 은행의 불완전판매에 있었다. 안전하다는 말로 고객을 꾀어내 전액 손실이 날 수 있는 상품을 판매했다. 고객의 투자 성향보다 공격적인 상품을 판매하지 않는 표준투자권유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DLF 사태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의 선택이었다.


반복되는 소비자 피해 사고

피해자들은 은행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대신 해당 은행의 은행장을 검찰에 사기죄로 고소했다. 소비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손해배상 소송보다 형사고발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집단소송이 불가능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였다.

2011년 이후 143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 1억40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신용카드 정보유출 사태, 최근 발생한 DLF 사태와 LG건조기 논란까지 기업의 잘못으로 애먼 소비자가 피해를 입는 사고가 끊임없이 터지고 있다. 기업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책임을 다하겠다며 고개를 숙이지만 그때뿐이다.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요구하면 모르쇠로 버틴다. 소송을 제기하면 대형로펌을 앞세웠고 법정공방을 불사했다. 때론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하기도 했다. 민법 제766조제1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지만 몇몇 기업은 보란 듯이 이를 악용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이 발의 8년 만에 국회 소관위를 통과했다. 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소송제는 제외됐다.[사진=연합뉴스] 

1억400만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카드사 정보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관련 공동소송 당시 카드사가 과도한 자료를 요구하며 재판을 의도적으로 지연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카드사는 소송 당시 구체적인 유출 경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와 소송인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서류를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카드사는 재판에 필요한 확인 과정이라고 항변했지만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넘기려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재판에서 지더라도 소멸 시효가 완성되면 추가적인 손해배상 소송이 불가능하다는 계산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도 소송을 진행하는 게 쉽지 않다. 국내에선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비자(원고)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최근 발생한 DFL 사태를 빗대어 설명하면, 은행의 불완전판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자는 가입 당시 상황이 담긴 녹취나, 문자 메시지, 설명자료 등을 직접 챙겨야 한다. 변호인의 도움을 받더라도 쉽지 않다.


DLF 사태의 피해자가 관련 은행의 은행장은 사기죄로 검찰에 고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공동소송처럼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가 많아지면 절차는 더 복잡해진다. 소송에 참여한 모든 소비자가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이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집단소송제도가 있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의 권리구제는 훨씬 수월해질 가능성이 높다. 집단소송에서 소비자가 승소하면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보상을 청구할 수 있어서다. 법정공방의 기간이 짧아지고, 기업이 재판을 지연시킬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집단소송제도의 국내 도입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2005년 도입된 증권집단소송은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됐다. 지난 21일 2011년 발의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의 8년 만에 국회 소관위를 통과했지만 정작 필요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는 제외됐다.

국회가 피해자의 아우성보단 소송 남발로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기업의 우는 소리를 더 경청한 셈이다. 백주선 민변 변호사는 “기업의 평판은 소비자피해를 유발하고도 책임지지 않아서 나빠지는 것”이라며 “기업 활동은 만약 소비자의 피해가 발생할 경우 이를 반드시 배상한다는 전제에서 보장되는 것이다”고 꼬집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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