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여야 보이는

❶헬렌 파시지안, Untitled, 2019년, 작가 제작 받침대와 캐스트 에폭시, 66㎝, 130.8×13㎝(받침대), ⓒ작가, 리만머핀뉴욕ㆍ홍콩ㆍ서울 소장 ❷헬렌 파시지안, Untitled, 2019년, 캐스트 에폭시 수지, 15.2㎝, 123.2×10.2×10.2㎝(받침대), ⓒ작가, 리만머핀뉴욕ㆍ홍콩ㆍ서울 소장

빛을 담는 작가 헬렌 파시지안(Helen Pashgian)은 대부분의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관람자들이 미리 결론을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의 조각은 내부에 독특한 형태의 프리즘을 삽입해 관람자가 작품과 맺는 물리적 관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관람자의 시각적 인지가 파시지안의 조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헬렌 파시지안의 개인전이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다. 리만머핀(Lehmann Maupin) 홍콩과 서울 갤러리 두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그의 대표적 작품인 렌즈, 구, 그리고 벽에 거는 조각들이 소개된다.


파시지안은 플라스틱 에폭시와 레진 등 산업 재료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테크닉을 발전시켰다. 원래 파시지안은 미술사를 전공해 학자의 길을 가고자 했다. 빛을 그리는 17세기 네덜란드 거장들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려던 그는 1960년대 초 예술 창작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산업 재료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며 주조 기술을 실험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 레진으로 단단한 형태 속에 빛을 가둘 수 있게 됐다. 날것의 재료들을 이용해 빛을 품고 발산하는 묘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❸헬렌 파시지안, Untitled, circa, 2010년, 캐스트 에폭시, 30.5×30.5×5.1㎝, ⓒ작가, 리만머핀뉴욕ㆍ홍콩ㆍ서울 소장 ❹헬렌 파시지안, Untitled, 2019년, 캐스트 에폭시 수지, 15.2㎝, 123.2×10.2×10.2㎝(받침대), ⓒ작가, 리만머핀뉴욕ㆍ홍콩ㆍ서울 소장

그의 작업은 관람자와 작품을 ‘관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는 벽에 거는 조각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가장자리를 타원형으로 구부림으로써 마치 벽 앞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나타난다.

특정 위치에서만 볼 수 있는 요소들을 품고 있어, 관람자들은 움직여야만 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더 보고자 노력하는 관람자들에게만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지안의 작업은, 우리에게 면밀히 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따르라고 요청하는 듯하며, 혹여 놓치진 않았는지 계속 더 살펴보라고 권한다.

파시지안의 구형 작품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반사하고 굴절하는 빛의 특성을 면밀히 연구해 색조들을 선택했다. 사포질로 반사광을 낸 이 구체들은 내부에 삽입한 형체를 통해 주변 환경의 이미지와 빛을 흡수하고 왜곡한다. 파시지안은 최근 렌즈 작품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다. 좌대 위에 놓인 이 볼록한 원반의 중심부 역시 색채를 발산하고 표면 가장자리는 주변 환경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한 효과를 보인다. 전시는 2020년 2월 1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이지은 더스쿠프 기자 suujuu@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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