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게으름에 무관심에
세상서 사라진 네이밍 법안

지난 9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동생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9살 김민식군이 과속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어린이 안전을 강화하자는 취지의 ‘민식이법’이 발의됐다. 이 법은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었는데, 야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으로 발이 묶였다. 국회 정쟁에 아이들의 안전이 볼모로 잡혔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야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금배지들의 정쟁에, 게으름에, 무관심에 사그라진 법안이 숱하다. 그중엔 민식이법처럼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도 적지 않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네이밍 법안의 민낯을 취재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을 딴 ‘어린이 안전 생명법’이 숱하다.[사진=연합뉴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을 딴 ‘어린이 안전 생명법’이 숱하다.[사진=연합뉴스]

윤창호법, 김용균법, 양진호법…. 모두 사건의 피해자나 처벌 대상자의 이름을 딴 법안이다. 이른바 ‘네이밍 법안’ ‘실명 법안’이라 불리는데, 이런 방식의 ‘이름 붙이기’는 평가가 엇갈린다.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법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평도 있지만 “법안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취지나 의도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피해자 가족에 아픔을 상기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어쨌거나 네이밍 법안이 쏟아져 나오는 건 해당 법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높다는 방증이다. 

■모욕의 악순환 = 최근 관심을 받은 네이밍 법안은 ‘민식이법’이다. 이 법은 지난 9월 충남 아산에서 고故 김민식(9세)군이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과속차량에 치여 숨진 사고를 계기로 발의됐다. 

아산시가 지역구인 강훈식(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어린이보호구역 내 과속단속카메라 설치 의무화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 사망사고 발생시 3년 이상 징역 부과 등을 골자로 한 도로교통법ㆍ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지부진하던 이 법이 주목을 받은 건 민식군 어머니 박초희씨가 지난 11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서 첫번째 질문자로 나서면서다. 박씨는 문 대통령에게 “또다른 어린이가 희생당하지 않도록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자 민식이법의 개정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11월 2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었고,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 상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날 자유한국당이 민식이법을 포함한 199개 법안에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신청하면서 법안처리가 무기한 연기됐다. ‘민식이법을 정치적 협상카드로 쓰고 있느냐’는 비판을 의식한 자유한국당이 원포인트 국회를 열어 민식이법을 처리하자고 제안했지만 민주당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고故 김민식군의 어머니 박초희씨는 지난 11월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 참석해 눈물로 호소했다.[사진=연합뉴스]
고故 김민식군의 어머니 박초희씨는 지난 11월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 참석해 눈물로 호소했다.[사진=연합뉴스]

■희생의 악순환 = 민식이 부모가 “아이들 이름을 모욕하지 말라”고 오열하는 사이에  또다른 네이밍 법안을 남기고 떠난 고故 김용균(당시 24세)씨의 1주기(12월10일)가 다가오고 있다. 김씨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로 지난해 컨베이어벨트 점검 도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인1조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였다. 이후 ‘위험의 외주화’를 꼬집는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김씨의 이름을 딴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같은달 국회를 통과했다. 김용균법은 ▲유해ㆍ위험 작업의 도급 제한 ▲원청 책임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용균법의 개정 역시 늦어도 한참 늦은 조치라는 지적이 많다. 앞서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하청업체 직원 김모(당시 19세)군이 지하철에 치여 사망한 이후 법 개정의 필요성이 대두돼 왔기 때문이다. 관련 법안도 쏟아져 나왔지만 기업들의 반발로 2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이었다. 결국 법이 개정되는 덴 또다른 희생이 필요했던 셈이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때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윤창호법(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도 그중 하나다. 이 법은 지난해 9월 부산에서 휴가를 나온 군인 고故 윤창호(당시 22세)씨가 만취한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사망한 사고를 계기로 마련됐다.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낸 경우 3년 이상의 지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처벌 강화 ▲운전면허 정지 기준을 혈중알코올농도 0.05~0.10% 미만에서 0.03~0.08% 미만으로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들은 이미 17ㆍ18ㆍ19대 국회 때부터 쏟아져 나왔다. 2012년 이상민(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대표적이다. 이 안은 윤창호법과 마찬가지로 운전면허 정지기준을 0.03~0.08% 미만으로 강화하는 한편 음주운전을 방조한 동승자까지 처벌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19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임기만료 폐기됐다.

제2의 크림빵 아빠 왜 못 막았나 

2015년에도 도로교통법을 개정할 기회가 있었다. 이른바 ‘크림빵 아빠’ 사건이 기폭제가 되면서 음주운전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크림빵 아빠 사건은 2015년 1월 충북 청주에서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29세 가장이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트럭에 치여 사망한 사고다. 사고 한달 후 국회에선 ‘음주운전 근절을 위한 법ㆍ제도 개선방안’ 공청회도 열렸다. 

공청회에선 일본의 사례를 들어 음주단속 기준을 0.03%까지 하향할 경우, 음주운전 사망자 수가 4분의 1로(일본 2002년 1276건→2012년 287건) 감소한다는 한국교통연구원의 조사결과도 발표됐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음주운전단속 기준인 0.02%와 비교해도 국내 기준이 허술하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에서 낮잠만 잤고, 국회는 ‘제2ㆍ제3의 크림빵 아빠’를 막지 못했다. 

2016년 구의역 사고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관련 법안은 2년간 잠만 잤다.[사진=뉴시스]
2016년 구의역 사고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관련 법안은 2년간 잠만 잤다.[사진=뉴시스]

■망각의 악순환 = 올해 7월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네이밍 법안 중 하나다. 이른바 ‘양진호법’이다. 지난해 10월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직원들에게 상습적 갑질과 폭행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탔기 때문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발의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직장 내 지위ㆍ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한 괴롭힘 금지 ▲직장 내 괴롭힘 발생시 사용자의 적절한 조치를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최초로 발의된 건 19대 국회이던 2013년이다. 당시 한정애(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직장 내 괴롭힘을 법적으로 금지 ▲피해 근로자에 불리한 조치 금지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사용자의 적절한 조치 의무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관심을 받지 못했고, 임기만료 폐기됐다.

그사이 2014년 대한항공 ‘땅콩회항’, 2018년 2월 대학병원 간호사 태움 피해로 자살, 2019년 1월 서울의료원 간호사 태움 피해로 자살 등 직장 내 괴롭힘 피해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국회 들어서도 이인영ㆍ주승용ㆍ이정미ㆍ김관영ㆍ이용득 의원 등이 대표 발의한 총 14건의 관련 법안 중 한건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결국 양진호법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나서야 5년 만에 법안이 통과됐다. 

네이밍 법안 뒤 희생자들 

쏟아져 나온 네이밍 법안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희생자가 감춰져 있는 셈이다. 처리가 불투명해진 민식이법뿐만 아니라 사고로 희생당한 아이들의 이름을 딴법안들이 아직 많다. 어린이 보호를 위한 법적 테두리를 만들기 위한 해인이법(어린이안전 기본법안), 체육시설 통학차량까지 어린이통학차량에 포함하려는 태호ㆍ유찬이법(도로교통법ㆍ체육시설설치이용에관한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등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도 못된 채 20대 국회와 함께 폐기 수순을 밟을 공산이 크다. 슬픈 네이밍 법안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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