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형 리더십과 독선
잡초경영과 방만경영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명언이자 그가 쓴 베스트셀러의 제목이다.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만든 김 전 회장은 이 명언을 남길 무렵, 젊은이들의 우상과 같았다. 하지만 가파르게 성장한 만큼 추락 속도도 빨랐고, 족적을 남긴 만큼 좋지 않은 전례도 남겼다. 더스쿠프(The SCOOP)가 9일 생을 마감한 김 전 회장의 ‘비사祕史’를 소개한다. 그의 업적과 거기에 숨어 있던 위험요소를 모두 밝혔다. 대우그룹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김우일 대우M&A 대표가 기억을 보탰다. 

김우중 전 회장은 세계그룹 건설이란 영예를 맛봤지만 혹독한 망명생활이라는 대가도 치러야 했다.[사진=뉴시스]
김우중 전 회장은 세계그룹 건설이란 영예를 맛봤지만 혹독한 망명생활이라는 대가도 치러야 했다.[사진=뉴시스]

9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김 전 회장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대우그룹을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 ‘빈주먹의 청년’ ‘세계경영의 기수’ 등 자신에게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별세를 두고 생전에 고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각계 인사의 애도와 미디어의 우호적인 평가가 이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공과는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그의 평가가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추모도 할 수 있다. 김 전 회장은 뛰어난 경영자였지만 그와 대우그룹이 재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적지 않다. 김우중 전 회장의 세가지 명암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 첫번째 명암 | 동반자형 리더십 = 한때 국내 최고 회사 대접을 받았던 한성실업 샐러리맨을 단숨에 때려친 김 전 회장은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나로 먹고살 만큼 포부가 원대했다. 그가 대우그룹의 리더에 등극할 때의 일화다. 김 전 회장은 1970년대 쟁쟁한 선배들과 대우실업을 공동창업 했는데, 사세가 확장되면서 리더가 필요했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선배들과 리더 자리를 두고 다퉜다.

그때 리더 제1덕목으로 꼽혔던 게 바로 ‘호연지기.’ 큰 포부를 가진 사람을 선출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호연지기’ 하나 만큼은 김 전 회장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는 리더에 올랐고, 대우그룹을 한때나마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동반의 리더십으로 호평 그러나… 

김 전 회장은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결코 부하 직원에게 ‘명령’하는 법이 없었다. 직접 발로 현장을 뛰어야 직성이 풀렸다. 세계현장을 누비며 고생하는 종업원을 손수 격려하고, 분발시키는 건 김 전 회장만의 고유권한이었다. 

1980년대 중반, 김 전 회장이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자재운반열차를 탔을 때 얘기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새우잠을 자며 운반자재를 지키는 건설직원을 발견하고 이유를 물었다. 직원은 “자재를 운반할 때 분실되는 사례가 많아 어쩔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김 전 회장은 곧바로 그 직원에게 ‘일계급 특진’이라는 영전을 수여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그가 1980년대 말 리비아 사막현장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신장 160㎝, 체중 120㎏의 직원과 만났다. 과체중이었다. 김 전 회장은 스스럼없이 직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3개월 후까지 체중을 70㎏까지 감량하지 않으면 사표를 받겠다.”

직원은 불철주야 일을 하리면서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결국 50㎏를 감량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3개월 후 김 전 회장은 잊지 않고 이 직원에게 찾아가 이런 말을 남겼다. “노력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행복이 온다. 살 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니 남다른 인재인 것 같다.” 

언뜻 보면 사소한 에피소드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총수가 직원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그렇다. 김 전 회장은 탁월한 ‘동반자형 리더’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리더십은 조직의 융통성과 자율성을 깨뜨리는 리스크가 있었다. 동반자형 리더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의 다른 말이었다. 

임직원들은 김 전 회장에 대단한 존경심을 보였다.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대우그룹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조차 리더의 판단에만 기댄 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 두번째 명암 | 세계경영의 패착 =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모태를 ‘무역회사’로 삼았다.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수출에 주력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김 전 회장은 실제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 미국, 유럽 곳곳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은 미지의 땅에 진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수많은 불모의 땅은 그에게 희망의 초지였다.

외국 진출 방식은 여느 기업인과 달랐다. 지사, 연락사무실을 세워 본사와 교류하던 다른 기업과 달리, 김우중은 현지에 뿌리를 내리려 애썼다. 유독 대우그룹에 해외 법인이 많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이렇게 역설했다. “우리가 가는 불모의 땅에 임시 가설숙소를 만들 게 아니라 불모의 땅에 상품을 팔 수 있을 때까지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을 만들어라. 그리고 이 건물은 현지에서의 돈으로 만들고 유효기간이 지날 때엔 현지에 내버려두고 철수하자. 내버려진 건물은 그 자체가 현지의 자산이요, 대우그룹의 금자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이 금자탑을 대우의 상징으로 인식할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철저하게 잡초경영을 펼쳤다. 어느 환경에서도 잡초처럼 동화돼 뿌리를 내리는 게 주요 과제였다. 가령 열대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냉장고를 팔 때는 ‘썩지 않는 공간’이라는 콘셉트를 주입시켰고, 에스키모인에게는 냉장고 속에 두면 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역으로 시작한 대우그룹은 건설ㆍ자동차ㆍ기계ㆍ조선ㆍ섬유ㆍ화학ㆍ증권ㆍ은행ㆍ전자ㆍ통신ㆍ운수ㆍ유통 등 인류가 필요한 전 업종에 진출했다. 때문에 수많은 계열회사가 존재했다. 구조조정본부의 계열사 관리 책임자는 이 많은 회사를 관리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아마도 김 전 회장 조차 헷갈렸던 것 같다.

세계경영 신화의 그림자

다음은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어느 날 구조본 사람들과 독대한 자리에서 김 전 회장은 한 회사를 지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 우리 소유 맞아? 아니지?” 구조본 사람들은 곧바로 정기 감사대상 회사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그 회사는 명실상부한 계열회사였다. 얼마 후 김 전 회장은 “계열회사인데 왜 감사를 안 하느냐”며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대우그룹에 수많은 계열사가 존재했던 이유는 잡초처럼 전 세계의 땅에 대우의 깃발을 꽂기 위해서였다. 끈질긴 잡초문화를 펼치기 위해선 많은 전진부대가 필요했던 셈이다. 하지만 잡초처럼 무성한 기업확장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막대한 투자 자금이 필요했고, 대규모 외화 차입이 불가피했다.

이는 대우그룹이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내실이 부족하게 된 원인이 됐다. 실제 정부는 대우그룹의 잡초와 같은 번식력을 ‘무분별한 기업확장’으로만 여기고 압력을 행사했다. 김우중식 ‘잡초경영’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도움말=김우일 대우M&A 대표  wikimok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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