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파트4]최초 아닌 최초의 불편한 진실

최초라는 단어는 매력적이다. 기술혁신이 기업 성장가능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짜 최초가 몇이나 되느냐’다. 중소기업 CEO들은 “백이면 백, 돈 많고 힘 있는 기업이 ‘최초’라는 타이틀을 탄다”고 말한다. 무슨 말일까. 중소기업이 말하는 ‘최초’의 불편한 진실을 살펴봤다.

 
2011년 3월 애플 수뇌부 중 한명인 오펜하이머 최고재무책임자(CF O)는 구글에 “기술을 훔치지 말고 스스로 개발하라”고 쏘아붙였다. 당시 구글은 각종 특허 기술을 취득하기 위해 모토롤라 모빌리티를 인수하려 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던 애플이 ‘기술을 돈 주고 착취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라’며 핀잔을 준 것이다.

그럼 애플은 떳떳할까. 1988년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자신들의 그래픽사용자환경(GUI) 기술을 베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 기술의 원조는 복사기 회사 제록스다. 애플과 MS는 제록스 팔로알토연구소 출신 연구원을 스카우트하는 방법으로 GUI 기술을 손에 넣은 후 자본을 동원해 빠르게 상품화했다.

제록스는 1989년 애플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그 결과 제록스가 만든 ‘최초의 영광’은 애플에게 넘어갔고, 세상 사람들은 GUI를 최초로 만든 기업으로 애플을 떠올린다. ‘최초’는 강자의 전유물일지 모른다.

▲ 혁신의 상징 그래픽사용자환경(GUI) 기술의 최초 개발자가 제록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GUI 기술이 구현된 컴퓨터 알토(사진)까지 출시했지만 '최초의 영광'은 애플에게 돌아갔다.
국내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대기업일수록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최초’라는 타이틀을 쉽게 획득한다. 이를테면 대기업은 자신들의 엄청난 힘을 이용해 중소기업의 ‘최초제품’을 뺏어오는 데 능하다는 얘기다. 2010년 12월 22일 현대차그룹 부품 계열사 현대모비스는 “세계 최초로 차량용 한지스피커를 개발해 신형 그랜저HG에 장착한다”고 밝혔다.

현대모비스는 “한국 전통 한지를 스피커에 접목해 재생하는 것은 현대모비스만이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라며 “독자 기술로 외국 유명 스피커 브랜드와도 경쟁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프리미엄 스피커 시장을 흔들 만한 혁신성에 친환경 이미지가 더해져 그랜저HG는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소 스피커제조업체가 들고 일어났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도용해 생산해놓고 최초라고 속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자연이 그려내는 소리의 양길섭 대표는 “2009년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에서 두 차례 한지스피커 관련 기술 강의를 한 바 있다”며 “연락이 끊기고 1년6개월 후 세계 최초 기술로 둔갑해 출시됐다”고 말했다.

‘최초 영광’ 강탈하는 대기업

▲ 현대모비스는 2010년 12월 차량용 한지 스피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기술을 도용한 것으로 알려져 '세계 최초'라는 표현 사용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사진은 올 6월 일본 완성차업체 스즈키 본사에서 열린 현대모비스 기술전시회.
거기에 소노다인이라는 업체가 양질의 한지 스피커를 2009년부터 유통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당시 현대모비스는 “자체 연구팀이 2008년부터 서경하이텍, 아미모스 등의 업체와 협력해 제품을 개발해왔다”며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업체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허진 소노다인 대표는 “서경하이텍은 한지스피커의 높은 생산단가에 한계를 느끼고 제품 개발을 포기했던 기업”이라며 현대모비스의 주장을 일축했다. 또한 “현대모비스가 세계 최고•최초라 공인하는 기술은 한지 전문 업체라면 누구나 구현할 수 있는 초보적 공법으로 10점 만점에 6점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는 파문이 커지자 지식경제부가 마련한 소노다인과의 대면자리에서 ‘세계 최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기술침해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나 후속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허 대표는 “독보적 기술력으로 버텨서 망정이지 기술유출 이후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도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중소기업이 부지기수”라며 “좁은 업계 특성상 또 언제 현대모비스와 아쉬운 관계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더 이상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혁신기술을 양산으로 연결할만한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에게 ‘최초 기술개발’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해당기술을 낚아채 제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다.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S사. 세계 최초로 개발한 휴대전화 부품 기술을 내놓고 단꿈에 빠졌다. 일사천리로 대기업 K사와 2008년 독점계약을 맺었다. K사의 요구로 모든 기술 자료를 넘겼으나 K사는 느닷없이 계약을 파기했다.

S사는 K사가 신제품을 개발해 자사의 신기술을 사용하기만을 1년7개월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K사는 S사의 기술을 다른 업체로 넘겨 생산을 맡겼다. 결국 S사는 K기업에 납품하지 못했다. 자사의 독자기술을 증명할 길이 없어 다른 대기업과도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하게 됐고 약 1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S사는 기술보호상담센터를 통해 해결방안을 찾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증거 입증을 위한 변호사 선임부터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겠다 싶어 S사는 소송 의지를 상실했다. K사에 언제 또 부품을 납품하게 될지 모르는 처지에 밉보일까 두렵기도 했다. S사는 또 다른 ‘최초’ 기술을 만들 의지를 잃었다.

‘최초 아닌 최초’가 양산되는 이유는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에서 비롯된다. 대기업-중소기업 거래에서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기업으로 유출돼 최초로 둔갑되는 것이다.

올 8월 SK그룹 IT서비스 계열사인 SK C&C는 중소기업이 국내 최초로 개발한 대차거래 중개시스템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SK C&C는 한국증권금융이 지난해 2월 발주한 40억원 규모의 대차거래 중개시스템 구축사업 대상자로 선정되기 위해 중소기업 A사의 기술개발 인력과 시스템 구축 매뉴얼 등 핵심 영업비밀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SK C&C 직원 4명은 2010년 말 A사 모 전 대표와 만나 기술 유출 계획을 세웠고, 모 전 대표 등 A사 전•현직 임직원 3명은 SK C&C 측과 함께 일하는 대가로 각각 월 1000만원씩을 받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중소기업은 졸지에 자신들이 국내 최초로 만든 기술을 대기업에 빼앗길 뻔 했다.

中企, 기술 뺏겨도 침묵할 수밖에 없어

이 사건은 ‘슈퍼 갑甲’ 위치에 있는 대기업이 하청업체(중소기업)의 기술을 유출해 ‘최초’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올 2월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3년 이내 기술 유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중소기업은 전체(대상 1500여개 기업)의 12.5%에 달했다. 또 기술 유출 한건당 평균 피해금액은 16억2000만원으로 조사됐다.

 
이런 피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대기업 중심의 산업경제 생태계 때문이다. 대기업은 기술 유출을 통해 만든 제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시장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기술 유출 등 불법 행위가 적발되면 과징금이 부과되지만 대기업 입장에선 시장에서 얻은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손해 볼 게 없다. 반면 최초를 빼앗긴 중소기업은 거래처(대기업)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반항하기 어렵다.

이진열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정책과 조사관은 “대기업에게 기술을 빼앗긴 중소기업의 신고를 받기 위해 핫라인까지 만들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갑을관계에 있기 때문에 뒷일을 우려해 신고하지 않는 중소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아 시장을 장악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면 그 대기업이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클 수 있도록 엄중한 처벌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용선•정다운 기자 brave11@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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