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구조제도의 맹점

소송구조는 경제적 약자들이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지만 실효성이 높지 않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소송구조는 경제적 약자들이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지만 실효성이 높지 않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돈이 없어서 제 권리를 포기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소송을 하려 해도 변호사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돈이 없어 소송을 못하는 이들을 위해 ‘소송구조제도’라는 걸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그림의 떡’일 경우가 많다. 왜일까. 

일찍 아버지를 여읜 최수영(가명ㆍ21)씨는 3년 전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잃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김씨는 4살 터울의 남동생과 함께 힘겹게 살았다. 공부를 썩 잘 한 편이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은 포기했다. 하지만 동생마저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는 주변의 얘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최씨는 어머니가 사망보험금을 남겨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씨는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을 대신 관리하고 있던 이모를 찾아갔지만, 이모는 어머니의 보험금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모는 연락을 받지 않거나 연락이 돼도 차일피일 미루기를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최씨는 소송을 알아봤다. 하지만 또다시 벽에 부닥쳤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최씨로선 변호사 수임료를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판비용을 면제해주는 ‘소송구조제도’를 활용하면 됐다.

문제는 이 제도를 통해 구제를 받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최씨 역시 소송구조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소송구조제도란 소송비용을 부담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법원이 신청 또는 직권으로 재판 비용의 납입을 유예하거나 면제해주는 제도다. 쉽게 말해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건데, 2005년에 도입됐다. 

소송구조의 대상은 민사ㆍ행정ㆍ가사소송은 물론 독촉사건, 가압류ㆍ가처분신청사건도 포함된다. 많은 이들이 이 제도를 잘 모르고 있지만 소송을 제기하려는 사람 혹은 소송 중에 있는 당사자, 외국인, 심지어 법인도 신청할 수 있다. 법원에 소송구조를 신청한 후 허가를 받으면 소송구조 지정 변호사를 찾아 사건을 의뢰하면 된다. 

소송구조제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조건은 소송 비용을 지출할 여력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엔 ‘소송구조 재산관계진술서’를 작성해 소명자료로 제출하면 된다. 

여기까진 별 문제가 없지만 ‘패소할 것이 명백하지 않은 사안이어야 한다’는 둘째 조건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사건만 소송구조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제도가 한정된 국가 재정을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확실한 승소가능성을 조건으로 삼은 건 타당하다. 하지만 승소 가능성만을 생각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생긴다는 건 이 제도의 취지와 어긋나 보인다.

‘패소할 것이 명백하지 않은 사안’이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도 따져볼 문제다. 재판은 당사자들의 주장이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인데, 재판을 하기도 전에 법원이 미리 ‘이길 수 있는 사안’을 재단한다는 건 옳은 절차로 보기 어렵다. 법조계에서 “모호한 인용기준과 법원의 보수적인 판단으로 인해 좋은 제도가 방치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경제적 약자를 위해 만든 소송구조제도의 인용률은 매우 낮은 편이다. 법원행정처가 발행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소송구조 인용률은 53.8%(처리된 건 기준)에 불과했다. 인용률이 형편없으니 소송구조 신청건수도 2015년 9666건, 2016년 7952건, 2017년 6330건, 2018년 5999건으로 계속 줄었다. 한해 40억~60억원의 돈이 소송구조 예산으로 배정되지만, 매년 다 쓰이지도 못하는 이유다. 

미국의 경우 변호사 보수는 원고와 피고가 각각 부담한다. 다만, 공익소송만은 소송비용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해 ‘편면적 패소자부담주의(one-way fee shifting)’를 도입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원고가 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패소자에게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고, 원고가 패소했다고 하더라고 상대 변호사의 비용은 부담하지 않는다. 소송구조제도의 허점이 메워지지 않는 지금, 도입을 생각해볼 만한 장치다. 
임희선 IBS법률사무소 변호사 ibslaw@ibslaw.co.kr|더스쿠프
정리=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