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입증 방법

2018년 삿포로 전前 총영사가 자신의 비서에게 상습적인 폭언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건 해당 비서가 피해 상황을 녹음한 40여개의 파일이었다. 흔히 동의를 구하지 않고 녹음하는 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피해 근로자가 직접 당한 폭언이나 모욕적 발언을 녹음하는 건 불법이 아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입증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직장 내 괴롭힘을 입증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넌 머리가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뇌 어느 쪽이 고장났어.” 전前 일본 주재 삿포로 총영사가 자신의 비서 A씨에게 쏟아낸 폭언이다. 총영사(당시 직책)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A씨에게 수십차례 폭언을 일삼은 것으로 밝혀졌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A씨는 우울증을 앓게 됐고, 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검찰은 A씨의 우울증의 원인이 총영사에게 있다고 보고 상해죄를 적용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중요한 증거 역할을 한 건 40여개에 달하는 녹음 파일이었다. A씨가 총영사가 폭언을 할 때마다 몰래 녹음한 파일이었다. 많은 분들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녹음을 하는 건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면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 위반 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타인 간의 대화’라는 점이다. 녹음하는 자가 대화 당사자 중 한명이라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녹음하더라도 불법이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가해 근로자가 피해 근로자에게 폭언을 했고, 피해 근로자가 이를 녹음했다면 당사자 간 대화임으로 불법 녹음에 해당하지 않는다. ‘총영사 사건’에서 녹음파일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을 처벌하는 데는 ‘증거’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피해를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함께 직장생활을 하는 동료들이 증언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선뜻 나서는 이는 많지 않다. 또 신체폭행이 아닌 폭언이나 모욕 등 ‘말’로 이뤄지는 직장 내 괴롭힘은 입증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녹음 외에 증거를 모으는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필자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을 경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기록’이라고 강조한다.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일기처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지나면 피해 근로자 자신의 기억도 흐릿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한다고 해도, 뭉뚱그려 ‘괴롭힘을 당했다’고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가해 근로자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 

피해 근로자가 가해 근로자의 폭언을 녹음하는 건 불법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피해 근로자가 가해 근로자의 폭언을 녹음하는 건 불법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가해 근로자가 ‘모르쇠’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고, 회사로선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신고해야 피해 근로자 진술의 신빙성이 높아진다. 그래야 가해 근로자가 선뜻 부인하지 못하게 된다. 이밖에 사내 메신저ㆍ채팅방ㆍSNS·이메일 등을 통해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았거나, 언어폭력을 당했다면 내용을 캡처해서 보관해야 한다. 홧김에 메신저나 채팅방을 나오거나, 메일을 삭제하는 행동은 금물이다.

홧김에 채팅방 나와선 안 돼 

일례로, 피해 근로자가 메신저나 채팅방에서 나와 대화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가해 근로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대화 내용만 캡처해 증거로 제출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더욱이 한번 삭제한 대화 내용은 복구하기가 어렵다. 전문업체에 맡기더라고 휴대전화 기종에 따라 복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령 복구할 수 있다고 해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홧김에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드린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것도 괴로운데 내가 겪은 고통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해 근로자에게 죄를 묻기 위해선 피해 당사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냥 참아야지 어쩌겠냐”고. 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결국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기록하고 남겨둘 수밖에 없다. 나의 고통을 가장 잘 아는 이는 피해 당사자 본인이라는 거다. 
노윤호  법률사무소 사월 변호사 yhnoh@aprillaw.co.kr | 더스쿠프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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