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영구채 ‘가산금리의 덫’

두산인프라코어가 사실상 만기가 없는 채권을 발행했다. 이자만 내고 원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태에서 5억 달러(5570억원)를 조달했으니 언론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 채권의 발행조건에는 특이한 내용이 있다. 5년 뒤 채권을 환매하지 않으면 가산금리 5%포인트가 추가로 붙는다는 것이다. 

▲ 돈을 빌리고 만기 없이 이자만 낼 수 있다면 자금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른바 영구채권의 개념이다.

두산인프라코어가 10월 7일 국내 기업 사상 처음으로 영구채권(Perpetual Bond) 발행을 발표했다. 5억 달러(약 5570억원) 규모로, 발행 후 곧바로 싱가포르 증시에 상장됐다. 이번에 발행된 채권은 30년 만기다. 그러나 두산인프라코어 측이 얼마든지 임의로 연장할 수 있다. 실제로는 만기가 없는 영구채라는 얘기다.

영구채는 ‘하이브리드 채권(Hybrid Bond)’ 또는 ‘신종자본증권’이라고도 부른다. 발행사가 원금을 상환하지 않고 일정한 이자만 지급해도 된다. 따라서 채권발행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사실상 ‘자본’이나 마찬가지다. 회사채와는 달리 부채비율을 낮출 수도 있다. 제3자 유상증자와 달리 대주주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두산 하이브리드채권의 발행주간사는 산업은행•JP모건•씨티은행 등이다. 금융자문은 산업은행이 단독으로 맡았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채권발행 사인을 마친 뒤 강만수 산업은행장(KDB금융그룹 회장)은 “(이번 두산 하이브리드채권 발행은) 세계적 격변기를 맞은 기업들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영구채는 금융지주회사나 은행권에서만 발행이 가능했다. 올 4월 15일 상법이 개정되면서 일반기업도 발행이 가능해졌다. CJ제일제당의 해외법인인 ‘PT CJ인도네시아’에서 지난 4월 신종자본증권형식의 영구채를 발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PT CJ인도네시아’는 모기업이 한국기업일 뿐 사실상 해외 법인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두산인프라코어가 국내기업 중 처음이 맞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영구채 발행은 재무안전성 측면뿐만 아니라 (자금조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재무혁신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해야 기업경영도 발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두산 자금난에 단비같은 존재

이번에 발행된 두산 하이브리드채의 금리는 미국 국채 5년물에 265bp(1bp=0.01%)를 더한 3.328%다. 두산에서 영구채 발행에 성공함으로써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한 다른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대한항공, 한국서부발전 등이 적극적으로 영구채 발행을 추진 중이다.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 국내 대표 해운회사들도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해운회사 측은 채권 발행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해운업이 부채비용이 높은 업종이라 외부에서 (영구채 발행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는 것 같다”며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번에 발행된 영구채권은 5년 뒤 두산인프라코어가 환매하지 않으면 투자자가 ‘매입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때 신용공여 은행인 산업은행과 우리은행•하나은행이 채권 매입을 책임진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신용보강으로 발행금리를 대폭 낮추고 별도의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발행사의 리스크를 크게 줄였다”고 밝혔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하이브리드채권 발행으로 두산 측이 자금 리스크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2007년 미국 대기업인 ‘밥캣(현 두산인프라코어인터내셔널)’을 인수하면서 자금난을 겪어왔다.

발행주체인 산업은행과 두산인프라코어는 영구채의 성공을 낙관하는 듯하다. 하지만 비관론도 나온다. 이번에 발행된 두산 하이브리드채가 순수한 성격의 영구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앞서 말했듯 두산 하이브리드 채권은 임의연장이 가능하므로 사실상 만기가 없다. 그러나 여러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다. 5년 뒤 두산인프라코어가 조기상환할 수 있는 ‘콜옵션(call option)’과 투자자가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풋옵션(put option)’이 그것이다.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건 콜옵션이다. 5년 후 두산인프라코어가 조기상환(콜옵션 행사)하지 않으면 가산금리가 5%포인트 붙는다. 7년 뒤에는 2%포인트 추가된다. 5년 뒤 조기상환하지 않을 경우 이율이 기존 3.328에서 8.328%로, 7년 뒤에는 10.328%로 급격히 높아지는 것이다.

가산금리 5%포인트 추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금액이 적으면 그렇다. 100만원짜리 채권에
▲ 두산 하이브리드채권에 대해 금융자문을 맡은 강만수 산업은행장. 그러나 영구채 발행 직후부터 여러 의문이 쏟아지고 있다.
5%의 가산세가 붙으면 약 5만원만 더 내면 된다. 하지만 금액이 커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5000억원 채권에 5%의 이자가 붙는다면 가산되는 금액은 250억원에 달한다. 이런 이유로 큰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일수록 작은 단위의 이자율까지 따지게 마련이다.

까다로운 연장조건을 감안했을 때 두산인프라코어는 영구채를 5년 뒤 조기상환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발행된 하이브리드채가 사실상 ‘5년만기 은행채’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보통 하이브리드 채권은 일반 회사채보다 금리가 높지만 가산금리 5%는 과도한 부분이 있다”며 “5년 뒤 두산인프라코어가 콜옵션을 행사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5년 뒤 상환하지 않으면 가산금리가 높아져 콜옵션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확정된 건 아무 것도 없다”며 “시간 여유가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검토할 계획”이라 말했다.

채권의 발행기준이 ‘선순위채’인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선순위채와 후순위채의 구분은 기업파산 시 변제 순위를 따지는 것이다. 선순위채권은 쉽게 말해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먼저 갚아야 하는 돈’이다.

해외에서 발행되는 하이브리드채는 대부분 후순위다. 따라서 선순위인 두산 하이브리드채는 ‘자본’으로써의 성격이 약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증권가에선 “두산 하이브리드채가 회계상으론 ‘자본’에 포함되지만, 실질적인 신용평가 기준에서는 ‘부채’로 간주될 확률이 높다”고 예상한다.

진정한 영구채인가

이에 대해 두산 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이번에 발행된 채권은 복합적이고 특이한 구조이다 보니 흑백논리로 자본과 부채의 기준을 나눌 순 없다”며 “(두산 하이브리드채가) 신용평가 상으로 ‘부채’가 된다는 명확한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금융전문가들은 일반기업의 영구채 발행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올해 4월부터 발행했기 때문에 제도상으로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다. 두산 하이브리드채가 영구채의 자격을 갖췄는지 논란을 빚는 것도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향후 이어질 일반기업들의 영구채 발행이 시끄러워질 공산도 있다.

Issue in Issue 투자자 관점에서 본 영구채권

이자 꾸준히 챙길 수 있지만 환금성은 약해

영구채권을 처음 발행한 나라는 영국이다. 1972년 ‘브리티시 콘솔(British Consol)’이라는 국가채권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4억 파운드(약 7200억원) 규모로 발행됐다. 지금도 런던 채권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의 공공법인체인 TVA(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에서 공사채를 영구 만기로 발행했다.

영구채는 국공채로 먼저 시작됐다. 그러나 이후엔 금융기관과 일반기업에서 주로 발행했다. 1984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은행이 발행한 영구채권이 금융기관으론 처음이다. 1990년대엔 코카콜라와 월트 디즈니사가 100년 만기의 사실상 영구채권을 발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최근엔 2010년 6월 있었던 유럽 최대 은행 HSBC의 영구채 발행이 유명하다. 약 34억 달러 규모였다.

영구채권은 투자자들에게 꽤 매력적이다. 만기가 영구적인 만큼 꾸준히 이자를 챙길 수 있어서다. 일반 회사채보다 금리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영구채는 발행이 많이 되지 않는 상품이다. 때문에 환금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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