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업계의 그림자

패션양말의 시대다. 정장 대신 캐주얼 복장을 입는 이들이 늘면서 패션양말 소비가 부쩍 늘어났다. 2년 전엔 짝짝이 패션양말을 신고 공식행사에 나선 총리도 있었다. 한국산 양말이 해외에서 품질과 기술력 면에서 인정을 받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양말제조업체엔 반가운 소식일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숱한 악재에 치인 탓인지 국내 양말업계는 말라 죽기(枯死) 직전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양말업계의 그림자를 취재했다. 

해외선 패션양말이 뜨고 있지만 국내 양말업계는 위기에 처해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해외선 패션양말이 뜨고 있지만 국내 양말업계는 위기에 처해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단정한 정장 바짓단 아래 노란색과 파란색 짝짝이 양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7년 5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와의 회담에서 영화 ‘스타워즈’를 모티브로 한 양말을 신고 등장했다. 국가 행사에선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트뤼도 총리의 양말은 위트와 센스로 받아들여졌다. SNS에서 큰 호응을 얻었음은 물론 양말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도 생겼다. 오죽하면 ‘양말 정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트뤼도 총리만의 얘기가 아니다. 무늬도 색깔도 화려한 양말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최근 2~3년 새 숱하게 늘어났다. 패션양말이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거다. 그 때문인지 미국의 양말류 시장은 수년째 성장세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미국의 2018년 양말류 시장 규모는 80억 달러(약 10조원)에 육박했다. 2018 ~2023년 양말시장의 성장률도 연평균 2.4%에 달할 전망이다.

스타킹 시장이 2018년 18억2560만 달러에서 2023년 16억6160억 달러로 쪼그라들 것이란 예측과는 대조적이다. 러시아의 양말류 시장도 2014년 10억 달러에서 2018년 10억9800만 달러로 커졌다. 러시아 양말(스타킹 제외)의 향후 5년간 성장률은 미국보다 2.8%포인트나 높은 5.2%로 전망된다(KOTRA). 

미국과 러시아의 양말시장이 커진 이유는 뭘까.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직장 내 복장 규정의 완화가 양말 수요를 부추겼다. 치마 대신 캐주얼 바지를 선호하면서 스타킹 대신 양말을 찾는 여성이 늘어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아울러 애슬레저(가벼운 스포츠웨어) 패션이 일상에 자리 잡으면서 운동화를 신는 이들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운동용 양말의 수요도 증가했다.

양말을 패션으로 생각하는 남성이 늘어난 것도 양말시장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KOTRA에 따르면 남성의 71%가 매일 양말을 신고,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의 양말을 선호한다. 양말 제조 업체 관계자는 “한번 신고 버리는 제품이란 인식이 강했던 양말을 패션 아이템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면서 양말시장이 가파르게 커졌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국내 양말업계에도 긍정적이다. 세계 각국의 양말시장이 커질수록 수출처를 다변화할 수 있어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산 양말이 높은 품질과 빼어난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에서 정평이 나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이런 기회를 붙잡을 만한 양말업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양말업계 사람들은 “고사 직전”이라면서 아우성을 친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 베트남, 터키 등에 밀릿 탓이다.

송인수 중앙양말협회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10년 전까지도 활발하게 수출했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다. 인건비·제조비가 저렴한 중국·동남아 등에 시장을 빼앗겼다.” 양말류 수출 실적은 2000년대부터 하락세다. 2006년까지도 3억 달러 선을 유지하던 수출액은 2007년부터 2억 달러로 꺾였다. 한번 꺾인 실적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미 해외 시장은 중국, 동남아 등이 점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2019년 양말류 수출액은 1억576만 달러(약 1226억원)로, 지난 4년 새 가장 적은 금액을 기록했다. 

대표적인 수출 대상국인 대미對美 수출액은 2016년 9640만 달러에서 2019년 7319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미국에 가장 많은 양말을 수출하는 중국(시장점유율 58%)의 2018년 수출액이 14억9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미국을 중국이 장악했다면, 러시아에선 터키가 강세다. 터키의 대러시아 양말 수출액은 2017년 532만 달러에서 2019년 1278만 달러로 훌쩍 커졌다.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2019년 62 만 달러(12월 4일 기준)에 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양말제조업체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많은 양말업체가 인력난에 시달린다. 인력이 없으니 물량을 맞추지 못하고, 이 때문에 수익이 또 감소하는 ‘악순환의 고리’까지 형성됐다.

여기에 한국경제의 고질병인 높은 임대료는 양말제조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숱한 양말제조업체들이 근거지였던 서울 도봉구를 떠나 성남·의정부·양주 등으로 빠져나간 것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러시아 등 세계 각국으로 판로를 확대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족 경영이라도 하면 서너 명으로 어떻게든 버티지만, 사장이 혼자 운영하는 곳은 매우 힘든 상황”이라며 “50대 사장이 젊은 축에 속하는 등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털어놨다. 송인수 대표는 “양말 가격이 수십년째 1000원 남짓으로 동결되면서 경쟁이 심해져 업계가 매우 어려워졌다”며 “앞으로 국내 양말 제조업체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며 우려했다. 2000년 한국산 양말의 수출액은 3억7460억 달러였다. 

지금 환율로 4342억여원이니, 1000원짜리 양말 4억3420만켤레를 수출한 셈이다. 하지만 이때의 영광은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잡을 수 없다. 임대료, 인력난, 출혈경쟁…, 한국경제의 고질병이 또 기회를 날렸다.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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