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와 한국경제의 민낯

사오정, 오륙도, 이태백, 삼포세대, 삼일절, 헬조선, 이생망, 달관세대…. 경기침체와 취업난에 허덕이는 한국경제를 풍자한 신조어들이다. 신조어를 통해 한국경제의 민낯을 더듬어볼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신조어가 갈수록 ‘극단의 부정’을 꼬집는다는 점이다. 헬조선, 이생망 등은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신조어의 대상이 중년층에서 청년층으로 내려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신조어를 통해 한국경제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면서 경제상황을 나타내는 신조어도 증가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19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로 떨어졌다. 잠재성장률도 2011~2015년 3.0~3.4%에서 2019~2020년 2.5~2.6%로 0.5~0.8%포인트 하락했다. 오죽하면 한국경제가 3%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란 냉소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당연히 각종 경제지표가 좋지 않다. 경기흐름을 보여주는 지표인 경기동행지수는 내림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99.3(2015=100)을 기록, 두달째 하락세를 이어갔다. 고용시장도 냉랭하다. 청년 체감실업률을 보여주는 ‘청년층 확장실업률’은 지난해 22.9%를 기록하며 2015년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소득 양극화 문제도 여전하다. 소득 1분위(하위 20%)와 5분위(상위 20%)의 격차를 보여주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5.37배나 됐다. 2018년 5.52배보다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지난해 이전소득이 전년 동기비 8.9%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득 양극화가 오롯이 개선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참고: 이전소득은 정부 복지정책 확대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소득을 의미한다. 아동수당·노인 기초연금 등의 사회보장급여가 대표적인 이전소득이다.]

그렇다고 한국경제의 밥줄인 수출이 예년 같은 것도 아니다. 지난해 수출금액은 전년 대비 10.3% 줄었다. 수출금액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글로벌 금융위기의 삭풍이 몰아친 2009년(-13.9%) 이후 10년 만이다. 지난해 무역수지 흑자 규모 역시 391억9000만 달러로 전년(696억5700만 달러) 대비 절반(43.7%)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지난 한해 취가(취업 대신 장가), 삼일절(31세까지 취업 못 하면 절대 취업 못 한다), 취업절벽, 국밥(가성비 중시), 온라인 폐지 줍기(앱 활용한 포인트·캐시 적립) 등 부정적인 신조어가 시장을 지배했던 건 어쩌면 이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신조어를 두고 “얄팍한 하소연” “능력없는 이들의 우는소리”라고 깎아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신조어의 함의는 상당히 크다. 한국경제의 현주소와 자화상을 웃프게 풍자하고 있어서다.

시계추를 IMF 외환위기 한파가 불어닥쳤던 1990년대 후반으로 돌려보자. 당시 최대 이슈는 구조조정이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기업은 정리해고라는 큰칼을 꺼내들었다. 이 때문인지 조기(조기퇴직)·명태(명예퇴직)·황태(황당퇴직) 등의 신조어가 쏟아졌다.

국민의정부(김대중 전 대통령)가 외환위기를 순조롭게 뚫고 나가던 2000년대 초반엔 ‘대박’ ‘부자되세요’ 등 희망 섞인 신조어가 나부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일상이 됐고,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졌기 때문이다. 사오정(45세 정년),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니트족(청년 무직자), 캥거루족(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20~30대), 공시족(공무원 시험준비), 88만원 세대, 중규직(정규직으로 비정규직 처우를 받는 노동자) 등의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하자 신조어는 더 독해졌다. 에듀푸어·하우스푸어·카푸어 등 각종 지출로 생활이 힘들어진 사람들을 의미하는 ‘○○푸어’가 등장한 건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7포세대(연애·출산·결혼·인간관계·내집·꿈·희망)’ ‘N포세대’ ‘헬조선’ 등 극단의 부정을 내포한 신조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신조어가 지칭하는 연령층이 40대 이상에서 청년층으로 낮아진 것도 눈여겨볼 만한 변화다.

가령, 1990년대 사오정, 사필귀정(40대엔 반드시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 등 4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한 신조어가 많았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삼팔선(38세 퇴직), 장미족(장기만 미취업 졸업생), 이구백(20대 90%가 백수) 등 고용불안·취업난을 나타내는 신조어의 대상도 낮아졌다.

신조어 함의 살펴야


십장생(10대도 장차 백수를 생각해야 한다), 십오야(15세만 되면 눈앞이 캄캄해 진다) 등 10대가 겪어야 할 취업난을 풍자한 신조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심지어 ‘이번생은 망했다’는 의미의 ‘이생망’이란 신조어까지 청년들 사이에선 번지고 있다.

남길임 경북대(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조어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며 “새로 만들어 쓰는 단어가 사회현상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들어 청년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신조어가 증가하고 있다는 건 젊은층이 느끼는 사회적·경제적 불안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취업절벽·고용절벽·인구절벽·소비절벽·성장절벽 등 벼랑에 선 한국경제를 빗댄 신조어를 허투루 들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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