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의 웃픈 경제학

‘플렉스’ ‘국밥 빌런’ ‘퇴준생’…. 최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유행어들이다. 가벼운 신조어에 불과한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마다 생기는 신조어와 유행어에는 당시의 세태가 반영돼 있다.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살펴보면 사회적·경제적 배경도 짐작할 수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신조어와 유행어에 담긴 경제학을 들여다봤다.

신조어와 유행어를 보면 당시의 세태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뉴시스]
신조어와 유행어를 보면 당시의 세태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뉴시스]

언젠가부터 온라인 커뮤니티를 휩쓴 밈(meme·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는 행동·양식 혹은 그의 이미지나 영상) 중에는 ‘국밥’이란 게 있다. 치킨이든 쌀국수든 무엇이든 국밥의 가격으로 환산하는 거다. 타깃은 음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일명 ‘국밥 빌런(villein)’ 중 한명인 ‘와썹맨’ 박준형은 슬라임 카페에 가서도 국밥을 찾았다.

국밥 빌런들은 이런 식이다. “그거 먹을 바에야 뜨끈한 국밥 3그릇 든든하게 먹지.” 급기야 비교하고 싶은 제품의 가격이 국밥 몇그릇에 해당하는지 환산해주는 국밥 계산기까지 등장했다. 

왜 하필 국밥일까. 6000~8000원에 판매되는 국밥은 서민의 소울푸드로 불린다. 1만원 미만으로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한끼를 먹을 수 있다. 라면이나 빵 같은 분식에 비해 포만감이 훨씬 크다. 극단적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는 행위인 ‘국밥 밈’은 가벼운 농담으로 쓰이지만, 그 배경에는 주머니 얇은 이들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있다. 

해마다 새로운 유행어가 쏟아진다. 단어만 들어서는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를 신조어도 숱하다. 신조어 중엔 무의미한 말장난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세태를 반영하는 단어가 대다수다. 신조어의 등장 배경과 사용 맥락을 보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플렉스 vs. 페이크슈머 = ‘플렉스(flex)’는 올해도 당분간 꾸준히 쓰일 듯한 유행어다. 단어의 원래 의미는 ‘몸을 풀다’지만 ‘돈이나 귀중품을 과시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지난해 한 힙합가수가 명품을 구입한 뒤 “플렉스 해버렸어”라는 말을 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플렉스하다’는 말의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최근 명품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는 밀레니얼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빅데이터 컨설팅 컴퍼니 롯데멤버스의 ‘트렌드Y 리포트’에 따르면 2019년 3분기 20대의 명품 소비는 2017년 3분기 대비 약 7.5배 늘었다. 


플렉스 문화의 핵심이 과시욕인 만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는 ‘명품 구입 후 플렉스했다’고 남긴 후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덕에 20대의 26.7%는 SNS 인플루언서를 통해 명품 정보를 얻는다. ‘페이크슈머’는 플렉스와는 상반되는 단어다. ‘가짜(fake)’와 ‘소비자(consumer)’를 합친 말로, 대용품을 찾는 소비자를 뜻한다. 가성비와 실용성을 추구하는 2030세대가 주로 해당된다. 이들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보단 개인의 가치에 맞는 소비를 한다. 예컨대 진짜 모피 대신 에코퍼를 구매하는 식이다.         

플렉스와 페이크슈머는 대조적인 단어지만 흥미롭게도 같은 현상을 가리킨다. 여준상 동국대(경영학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소비 양극화는 경기침체와 저성장 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특히 플렉스 같은 감성적인 소비 행태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분위기를 인지할 때 나타난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미디어에 민감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편도족의 출현 = 앞서 나온 국밥 밈이 시작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편의점 도시락 게시물이었다. 2016년 한 누리꾼이 “60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다”며 사진을 올리자 댓글에 “그 돈이면 국밥을 먹겠다”는 격한 댓글이 달린 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댓글의 주장과 달리 갈수록 편의점 도시락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일명 ‘편도족’이 등장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30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19년 10월 한달간 편의점에서 식사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58.7%에 달했다(미리보는 2020 외식트렌드). 가장 많이 구매하는 편의점 식사 제품은 도시락(44.6%)이었다. 편도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혼밥이 편한 데다 가성비가 좋아서다. 3000 ~5000원대면 다양한 반찬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직장인의 하루 평균 점심값이 7163원(잡코리아)임을 감안하면 훨씬 저렴하다. 

편의점 도시락 소비자의 50~60%는 20 30세대다. 플렉스 문화를 즐기는 세대와 겹친다. ‘점심은 3000원짜리 도시락 먹고 신발은 100만원짜리 신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여준상 교수는 “MZ세대는 밥과 생필품처럼 실용적인 것은 누구보다 아낀다”며 “명품을 구입하고 과시하는 데엔 실용적인 소비를 자제하는 것으로 인한 일탈과 보상심리도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안 샀니? 인싸템 = ‘아싸(아웃사이더)’의 반대말인 ‘인싸(인사이더)’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크게 유행한 단어다. 대학가에서나 주로 쓰이던 인싸가 유통가에서 유독 많이 보였다. 독특한 신제품에는 ‘핵인싸템’이, 새로 문을 연 카페나 음식점에는 ‘인싸라면 꼭 가봐야 할~’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식이다. 

인싸라는 단어가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효과는 컸다. 미국의 커피전문점 ‘블루보틀’이 지난해 5월 3일 성수동에 한국 1호점을 개장한 날, 매장 앞에는 오픈 전부터 200명이 넘는 사람이 줄을 섰다. 대만의 흑당 버블티 ‘타이거슈가’가 오픈했을 때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가지 음료 모두 ‘인싸템’으로 화제를 모았다. SNS에서 유행하는 제품에도 인싸 태그는 빠지지 않는다. 

급기야 한편에선 인싸라는 말이 남용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래 문화에 민감한 10대에게 무분별한 소비를 조장한다는 거다. 실제로 포털사이트에 “인싸가 되고 싶다”거나 “인싸템을 알려달라”는 10대의 고민글은 최근까지도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인싸 문화엔 과거와 다른 MZ세대의 가치관이 반영됐다는 거다. 임명호 단국대(심리학과)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옛날에는 인싸템 같은 소비를 허례허식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본다. 크게 비싸지 않고 품질도 괜찮다면 아이템을 구입하는 것이 MZ세대에겐 되레 합리적일 수 있다. 단지 남들이 가진 걸 따라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아이템을 소유함으로써 ‘톡톡 튀는 사람’이라는 내면적 가치까지 획득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취업해도 곧바로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힘들게 취업해도 곧바로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무전무업·퇴준생 = 청년 취업난은 우리나라의 고질병이다. 2014년을 기점으로 9%대를 유지하던 청년 실업률은 10%를 훌쩍 넘어섰다. 정부에서 일자리 사업을 벌이고 각종 지원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취업포털 커리어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의 74.7%가 2020년 취업시장이 2019년보다 더 어두울 것으로 예측했다.  

취업준비생을 둘러싼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는다는 얘기인데, 이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경제적 부담이다. 취업이 늦어지면서 학자금대출을 갚지 못하거나 생활비조차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는 이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이를 풍자한 신조어가 바로 ‘무전무업(돈이 없으면 취업도 못한다)’이다. 잡코리아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의 23.9%는 ‘생활고 수준의 극심한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하지만 바늘구멍만큼 좁다는 취업문을 통과하더라도 끝난 게 아니다. 

취업하자마자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이 숱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퇴준생(퇴사준비생)’이다. 급한 마음에 일단 취업해놓고 다음을 모색하는 이들을 풍자한 말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한해 평균 9.2회나 이직을 시도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방증이다.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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