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마케팅 시대

녹색병을 채택한 하이트진로의 테라는 출시 1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병 판매고를 올렸다.[사진=뉴시스]
녹색병을 채택한 하이트진로의 테라는 출시 1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병 판매고를 올렸다.[사진=뉴시스]

잘 고른 컬러 하나가 기업을 살리는 불씨를 지핀다. 맥주시장에서 고전하던 하이트진로는 초록병 맥주 테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마켓컬리는 독특한 보라색 로고로 소비자의 기억에 각인됐다. 하지만 이같은 컬러마케팅이 모든 분야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다. 컬러 범람의 시대에 소비자가 원하는 컬러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컬러마케팅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봤다.  

‘맥주=갈색병’ 공식이 깨졌다.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3월 녹색병에 담긴 맥주 신제품 ‘테라(TERRA)’를 선보였다. 하이트진로가 이같은 파격을 시도한 이유는 분명했다. 오비맥주에 내어준 맥주시장 1위(2011년) 자리를 되찾고 고꾸라진 맥주사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선 특단의 차별화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이트진로는 ‘청정함’을 테라의 콘셉트로 내세웠다. 호주 청정지역에서 생산한 맥아와 발효공정에서 자연발생한 탄산을 사용했다. 녹색병도 청정함을 강조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테라는 출시 10개월 만에 5억병(2020년 1월 기준)이 팔려나갔다. 오비맥주와 맥주시장 점유율 격차도 좁혔다.

박상준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1위와의 점유율 격차가 4%포인트 수준으로 줄었다”면서 “하이트진로가 다시 맥주업계 1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회사 관계자는 “제품력뿐만 아니라 같은 스타일의 맥주에 지루함을 느끼는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켜준 게 테라의 인기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 사이 소주시장엔 ‘하늘색’ 바람이 불었다. 이 회사가 지난해 4월 출시한 소주 신제품 ‘진로이즈백’도 색다른 컬러로 소비자를 잡았다. 진로이즈백은 1970년대 판매됐던 소주 진로의 ‘하늘색병’을 부활시켰다. 초록색 소주병에 익숙한 소비자에겐 색다른 경험을, 과거의 소비자에겐 추억을 소환시킨 셈이었다. 진로이즈백은 인기몰이를 톡톡히 했고, 지난해 12월 기준 1억병 판매고를 올렸다.

 

잘 고른 컬러 하나가 제품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른바 ‘컬러마케팅’이다. 제품뿐만이 아니다. 브랜드가 자리 잡는 데도 컬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온라인 식품배송업체 ‘마켓컬리(컬리)’는 브랜딩에 컬러를 잘 활용한 사례로 꼽힌다. 마켓컬리는 ‘보라색’을 브랜드의 시그니처 컬러로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품업계가 브랜딩에 빨강ㆍ노랑ㆍ주황ㆍ초록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택한 셈이다.

컬리 관계자는 “마켓컬리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식재료의 색감을 돋보여주는 색이 ‘보라색’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보라색 ‘가지’까지 돋보이게 하는 보라색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또 동틀 녘을 연상케 하는 보라색이 마켓컬리의 샛별배송 서비스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컬러전문가 이호정 세컨드맵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마켓컬리는 기존 식품업계가 주로 사용하는 빨간색이 아닌 보라색을 채택해 차별화를 꾀했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얻었다. 자칫 괴기해보일 수 있는 보라색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마켓컬리가 모바일 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라색이 노출되는 면적이 넓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의 거부감이 덜하다는 거다. 오프라인 매장을 보라색으로 꾸민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수 있다.”  보라색 효과 때문일까. 마켓컬리의 매출액은 2015년 29억원에서 2018년 1571억원으로 몰라보게 증가했다.  

기업들이 이렇게 컬러마케팅을 시도하는 건 제품이나 서비스 품질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차별화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호정 대표는 “브랜드와 제품이 넘쳐나는 공급과잉의 시대다”면서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차별화된 컬러로 소비자의 시각을 자극하고,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구매로 이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켓컬리는 보라색 ‘가지’까지 돋보이게 하는 보라색을 찾았다.[사진=컬리]
마켓컬리는 보라색 ‘가지’까지 돋보이게 하는 보라색을 찾았다.[사진=컬리]

실제로 컬러는 소비자의 구매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많다. 컬러엑스포(2004년)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92.6%가 “제품을 구입할 때 시각에 의존한다”고 답했고, 84.7%는 “제품 구입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는 컬러다”고 응답했다.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도 컬러는 주효하다. 잡코리아(2015년)가 컬러마케팅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94.4%가 “컬러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고 답했다. 또 “특정 컬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다”는 응답자도 86.4%나 됐다. 

컬러의 나비 효과


서용구 숙명여대(경영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컬러는 사람의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빨간색 포르쉐를 보면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검은색 양복을 입으면 엄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컬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선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컬러마케팅이 모든 분야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다. 자동차 업계나 가전 업계는 컬러 차별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 분야로 꼽힌다. 예컨대 현대차는 지난 1990년 빨간색 스포츠카 ‘스쿠프(Scoupe)’를 선보였다. 20대 전후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모델로, 수출용에 적용하던 화려한 컬러를 내수용에도 도입했다.

당시 흰색ㆍ검은색 차가 대다수이던 한국 도로에서 스쿠프는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후 컬러마케팅이라는 용어가 확산했고, 컬러 자동차 시대가 열릴 거란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어도 한국의 자동차 컬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컬러 선택지는 다양해졌지만, 소비자가 선택하는 색상은 여전히 무채색이 대다수다.

실제로 지난해(누적 계약 기준) 현대 신형 쏘나타의 컬러별 비중은 화이트크림(39.9%), 녹턴그레이(20.3%), 미드나잇블랙(13.5%) 등으로 무채색 비중이 73.7%에 달했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화려한 컬러를 선보인 쌍용 티볼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판매된 티볼리의 70%가량이 화이트 색상이었다.

서용구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는 집단의식이 강하고 남들보다 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이호정 대표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처럼 오래 두고 사용하거나 가격이 비싼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컬러보다는 무난한 컬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제품이나 브랜드의 본질에서 벗어나 지나친 파격을 시도하는 것도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품들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케첩업체 크래프트 하인즈는 지난 2000년 ‘녹색 케첩’을 출시했다. 토마토케첩은 빨갛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어린이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하인즈는 녹색을 시작으로 주황색ㆍ보라색ㆍ파란색ㆍ핑크색 케첩을 잇따라 선보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호기심은 구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들 케첩은 ‘건강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줬고 결국 2006년 단종됐다.

해태음료(현 해태htb)가 2001년 출시한 ‘옐로우 콜라’도 비슷한 예다. 옐로우 콜라는 ‘콜라 대혁명’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고, 개성 강한 10대들의 음료로 포지셔닝했다. 하지만 까만 콜라의 벽은 높았다. 옐로우 콜라는 2004년 단종됐다.

결국 수많은 컬러 중 소비자가 원하는 컬러를 찾는 게 기업의 과제가 된 셈이다. 이호정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 백색가전 시대에는 컬러를 구현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컬러 역시 공급 과잉의 시대다. 수백만 가지 컬러 중에 소비자가 선택하는 컬러는 한정적이다. 단순한 컬러 ‘선택’이 아닌 치밀한 전략을 기반으로 ‘설계’를 해야 한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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