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미경 무지개빛청개구리 센터장

아빠는 술만 취하면 손찌검을 했다. 소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윗집‧옆집‧뒷집 옥상에서 아빠가 잠들기만 기다렸다. 비가 오면 눈물을 삼켰고, 눈이 오면 슬픔을 머금었다. 하지만 소녀는 ‘폭력의 사슬’에 갇혀 있지 않았다. 질긴 비극悲劇을 홀로 떼쳤다. 고약한 삶을 끝내 이겨냈다.

지역청소년센터 무지개빛청개구리의 엄미경(52) 센터장. 폭력으로 얼룩진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꿈같은 청소년들을 보듬으면서 산다. 내 아이, 네 아이가 따로 없다. 무지개빛청개구리의 모든 아이들이 아들이자 딸이다. 그의 ‘역설적인 삶’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 이유다. 더스쿠프와 천막사진관이 그를 만났다. 18번째 주인공이다.
 

#1장. 기억나는 게 없었다 

“휙~.” 거친 바람이 사립문을 열어젖혔다. 성난 바람만큼이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우리 왔어요!” 성인 남성의 굵은 목소리. 12가구밖에 살지 않는 시골마을(전북 정읍군)이 쩌렁쩌렁 울렸다. 

밤 10시. 잠자리에 들려던 11살 소녀 미경의 귀에도 굵은 목소리가 성가시게 꽂혔다. 아빠였다. “우리? 또 새 아줌마가 왔나?” 미경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아빠도, 아빠의 여자도 보고 싶지 않았다. ‘새엄마’라면서 찾아온 아줌마가 네댓명은 됐지만 한결같이 싸늘했고, 금세 보따리를 쌌다.  2살 때 집을 나갔다는 엄마 기억은 아예 없었다. 할머니도 아빠가 오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각각의 빛이 모여 무지개가 만들어지듯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선 아이들 한명 한명의 개성을 존중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각각의 빛이 모여 무지개가 만들어지듯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선 아이들 한명 한명의 개성을 존중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1980년 1월…, 그날만은 분위기가 달랐다. 할머니가 유독 분주했다.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도 귓결을 맴돌았다. “미경아, 할머니 방으로 와보렴.” 미경이 할머니 방의 문을 열었다.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구들목엔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할머니가 입을 뗐다. “엄마란다, 인사하거라.” 반감이 본능적으로 몸을 휘감았다. “2살 때 집을 나갔다는 그 엄마?”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할 말도 없었다.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2장. 두부 장수와 파출부 

아빠는 두부 장수였다. 7남매 중 맏이였던 아빠는 두부를 팔아 동생들을 챙겼다. 남모를 희생이었지만 아빠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생각의 폭이 깊었다.  

햇볕이 따스했던 1968년 봄, 아빠는 파출부였던 엄마와 연緣을 맺었고, 예쁜 딸(미경)을 선물 받았다. 착한 성품 덕인지 안정적인 일자리도 얻었다. 방범대원이었다. 꿈같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비극悲劇은 꿈의 뒷면에서 싹트게 마련이다. 술, 그놈의 술이 화근이었다. 아빠는 술만 먹으면 괴물이 됐다. 엄마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폭력은 몹쓸 버릇이 됐고, 버릇은 집안을 망쳐놨다. 

어두운 골목길에도 불빛은 있다. 세상에 어둡기만 한 길은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두운 골목길에도 불빛은 있다. 세상에 어둡기만 한 길은 없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마는 미경이 두살 때 집을 나갔다. 아빠는 방범대원직에서 쫓겨났다. 홀로 남은 미경은 할머니집에 맡겨졌다. 1년, 또 1년…. 소녀가 된 미경은 엄마를 잊었다. 

슬픈 망각의 틈새를 메운 건 증오였다. 미경은 가끔씩 할머니집에 오는 아빠가 싫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짓, 비명처럼 내지르는 고함…. 상습적인 아빠의 무례가 싫었다. 1980년 1월 할머니집에서 아빠와 엄마를 만난 미경이 ‘차가운 시선’을 쏴붙였던 이유였다. 

그날 밤 미경은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둘이 합치겠다고 해서 널 서울로 데리고 가라고 했어. 내일 이 구두를 신고 올라가렴.” 할머니가 빨간 구두를 꺼내며 말했다. 고무신만 신고 다니는 손녀가 내내 안쓰러웠던 할머니의 선물이었다. 

미경은 성질을 부렸다. “서울 안 가, 안 간다고!” 할머니가 매섭게 꾸짖었다. “안돼 이것아. 아빠가 술 안 먹겠다고 약속했어.” 서울로 떠나는 날 아침,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툇마루엔 빨간 구두가 외롭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경의 눈에 슬픈 이슬이 맺혔다.  

어린 시절 엄미경 센터장의 손을 잡아준 건 할머니뿐이었다. 이제 엄 센터장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랑을 전달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린 시절 엄미경 센터장의 손을 잡아준 건 할머니뿐이었다. 이제 엄 센터장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랑을 전달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3장. 굵은 빗방울의 추억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툭하면 술을 들이마셨고, 폭력을 휘둘렀다. 남대문에서 음식을 배달하던 엄마는 “얼굴 다치면 안 된다”며 도망쳤다. 무서웠다. 술에 취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앞집·뒷집 옥상으로 몸을 피했다.

한밤이든 새벽녘이든 아빠가 잠들 때까지 그곳에서 버텼다. 비가 오면 눈물을 삼켰고, 눈이 오면 슬픔을 머금었다. 할머니마저 안 계셨다면 미경은 ‘운명 밖’으로 몸을 던졌을지 모른다. “별일 없지”라면서 할머니가 안부를 물을 때면 이를 악물었다. 

그날 밤에도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해있었다. 밖을 보니 먹빛 구름이 깔려 있었다. 미경은 습관처럼 비옷을 가방에 넣고 윗집 옥상으로 향했다. 굵은 빗방울이 미경을 때렸다. 마음이 아려왔다. 

아빠가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면 엄 센터장은 윗집 옥상으로 피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면서 누군가를 원망했던 시절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빠가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면 엄 센터장은 윗집 옥상으로 피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면서 누군가를 원망했던 시절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4장. 소녀, 방글 웃다
 
“제발 그만해!” “이 ×이 정말.” 아빠는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온몸에 피가 흘렀다. 마음엔 피멍이 새겨졌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웃도 비극을 못 본 척했다.   

미경은 ‘말 없는’ 여고생이 됐다. 체념은 침묵을 불렀고, 침묵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외로운 미경 옆에 ‘전도사’가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경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984년 부활절 전날, 전도사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전도사: “내일 나랑 어디 좀 갈까?” 
미경: “어디요?” 
전도사: “홀트란 곳인데 , 중증장애인들이 보호를 받는 곳이야.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희망 따윈 품고 싶지 않았다.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어’란 말만 되뇌었다. 감정의 단단한 표피가 물러지면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았다.  

엄미경 센터장이 정비소에 맡긴 차를 살펴보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잘 달려주는 고마운 친구다. 뒷 유리창에 ‘방글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방글이는 엄 센터장의 별명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이 정비소에 맡긴 차를 살펴보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잘 달려주는 고마운 친구다. 뒷 유리창에 ‘방글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방글이는 엄 센터장의 별명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다음날, 전도사와 미경은 장대비를 뚫고 홀트에 도착했다. 시설동‧작업동‧생활동 곳곳을 돌았다. 작업에 열중하는 중증장애인들이 보였다. 재활에 안간힘을 쏟는 이들도 있었다. 미경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삶을 탄식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의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데, 자학만 하고 있었구나….” 

탐방이 끝난 후, 미경과 함께 그림을 그렸던 뇌성마비 친구가 입구까지 배웅했다. “다음에 또 와, 그림 마저 그리자.” 어눌한 말투의 부탁. 미경은 새끼손가락을 걸었고, 3년 내내 그 친구를 찾아갔다. 의무감·동정심…, 이런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아빠처럼 ‘약속’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오후 5시께, 홀트를 빠져나왔다. 장대비를 쏟아붓던 먹장구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경의 눈에 햇빛이 말려들었다. 소녀가 방글 웃었다. 

엄미경 센터장은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잘 어울려 ‘방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의 미소는 보는 사람까지 웃게 만든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은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잘 어울려 ‘방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의 미소는 보는 사람까지 웃게 만든다. [사진=오상민 작가]

#5장. 역설적 삶의 울림 

새벽은 어둠을, 진실은 고통을 딛고 밝아온다
- 시인 박노해 -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도, 거짓을 깨부수는 진실도, 고통을 디뎌야 한다. 지역청소년센터(송파구) 무지개빛청개구리의 엄미경 센터장. 
그는 ‘폭력의 사슬’에 묶인 채 살았다. 아빠는 술만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이웃은 비극을 외면했다.

청소년 시절, 그는 혼자였다. 아픈 삶을 외롭게 배겨야 했다. 이해‧공감‧사랑‧희망…, 이 평범한 감정을 얻기 위해 질긴 사슬을 홀로 떼쳐야 했다. 


이 때문인지 엄 센터장의 ‘역설적 삶’은 깊은 울림을 준다. 꿈을 잃은 채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꿈같은 청소년을 보듬으면서 산다. 무지개빛청개구리에 다니는 청소년 35여명은 그의 아들이자 딸이다.  

설립한 지 20년, 13기 졸업생까지 배출했으니 사랑스러운 아들·딸이 한 아름이다. 무지개빛청개구리가 ‘비닐하우스 공부방(꿈나무학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서는 일년에 두번씩 들살이(캠프)를 진행한다. 모든 활동은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기획해 실행에 옮긴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서는 일년에 두번씩 들살이(캠프)를 진행한다. 모든 활동은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기획해 실행에 옮긴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은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의 또 다른 엄마다. 포근히 안아주는 모습은 일상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은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의 또 다른 엄마다. 포근히 안아주는 모습은 일상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즐거운가’의 신발장. 다양한 신발들이 빼곡히 차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꿈을 쌓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즐거운가’의 신발장. 다양한 신발들이 빼곡히 차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꿈을 쌓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람들은 “엄 센터장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손사래를 친다. “혼자가 아니었어요. 무지개빛청개구리엔 아이들·마을주민의 꿈이 투영돼 있어요.” 엄 센터장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중증장애인의 기저귀를 빨고 있는 스무살 미경이 오버랩됐다. 홀트,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6장. 우리들의 죽음 

1990년, 고3 때 취업했던 보험사에 사표를 냈다. 돈보다 중요한 걸 얻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을 보듬을 줄 알아야 했다. 

‘섬김의 길’을 택했다. 홀트의 생활복지사였다. 중증장애인에게 24시간 헌신해야 하는 역경의 삶이었다. 14명의 중증장애인을 보조했다. 새벽에 목욕을 돕고, 수북한 빨랫감을 손수 처리했다. 

고행苦行이었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이 고운 복지사가 되고 싶었다. 시간을 쪼개 ‘장애우대학’에도 다녔다. 차별과 역차별, 폭력적 동정심과 진심, 위로와 포용…, 깨쳐야 할 감정이 숱했다. 

해가 넘어간다. 금세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든든한 옆지기(이윤복)와 함께라면 문제없다. 마주잡은 손이 따뜻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해가 넘어간다. 금세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든든한 옆지기(이윤복)와 함께라면 문제없다. 마주잡은 손이 따뜻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과 옆지기(이윤복)는 최고의 단짝이다. 지금껏 걸어온 것처럼 앞으로도 함께 나아갈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과 옆지기(이윤복)는 최고의 단짝이다. 지금껏 걸어온 것처럼 앞으로도 함께 나아갈 것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런 거친 삶을 함께 걷는 이가 있었다. 한동네에 살았던 ‘옆지기(이윤복‧54)’였다. 아픔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난 행복할 자격이 없다’면서 수년을 밀어냈지만 그 사람은 오롯이 미경의 곁을 지켰다. 

소박하게 ‘연’을 맺기로 했다. 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미경이 마음을 열었다. 가정을 이룬다는 건 또 다른 ‘설렘’이었다.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홀트를 떠나야 했지만 그는 설렘만으로 행복했다.  

1994년 홀트에서의 마지막 휴가날. 미경은 옆지기와 ‘노래패 공연’을 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슬퍼하지 마….” 망원동 화재사건(1990년)을 읊은 노래 ‘우리들의 죽음(정태춘)’이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미경은 순간 ‘애달픈 통증’을 느꼈다. 4년 전 읽었던 기사가 또렷해지면서 가슴을 찔러댄 탓이었다. 

서울 망원동의 한 지하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바깥쪽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인명사고는 없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문을 열어보니 다섯살 딸은 방 안에 엎드린 채, 세살 아들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경비원 아빠와 파출부 엄마가 아이들이 나갈까봐 밖에서 문을 잠갔던 게 화근이었다(1990년 3월).

삭에서 갓 지난 초승달이다. 빛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초승달처럼 천사들은 너무 빨리 하늘로 돌아갔다. [사진=오상민 작가]
삭에서 갓 지난 초승달이다. 빛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초승달처럼 천사들은 너무 빨리 하늘로 돌아갔다. [사진=오상민 작가]

미경이 수년 전 기사를 선명하게 기억해낸 건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에 올라온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빠도, 엄마도 없었다. 아빠는 노동판으로, 엄마는 시장으로 일을 나간 탓이었다. 홀로 남은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탕 꾸러미와 쪽지 한장뿐이었다. “밖에 나가면 길 잃어버릴 수 있어. 집에만 있어.” 

낯선 공기, 낯선 소리, 낯선 집…, 공포가 밀려왔다. 보름여 집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밖에서 문만 잠그지 않았지, 미경의 처지는 ‘화마火魔’에 목숨을 잃은 두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우리들의 죽음’, 노래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조여왔다. 아픈 노랫말에 감정이 물결쳤다.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미경은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나마 ‘나만의 행복’에 설렜던 자신이 미웠다. 무거운 죄책감이 미경을 짓누르고 있었다. 

#7장. 다름을 이해하는 방식

힘없는 아이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했다. 홀트처럼 24시간만 아니라면 헌신할 수 있었다. 미경의 눈에 ‘공동육아조합 교사모집’이란 채용공고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장애아와 비장애아를 통합교육한다는 어린이집이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전 엄미경이란 사람입니다. 홀트에서 근무했습니다. 지원하고 싶습니다.” 절박함은 통했다. 어린이집은 미경을 선택했다. 장애아 2명의 전담교사였다. 뇌성마비 1명, 지적장애 1명이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기계적 통합만으로 두 아이를 보듬는 건 불가능했다. 

무지개빛청개구리 교사들은 다양한 생각과 고민을 함께 나눈다. 엄미경 센터장의 든든한 동료들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 교사들은 다양한 생각과 고민을 함께 나눈다. 엄미경 센터장의 든든한 동료들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뇌성마비 아이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먹을 때, 걸을 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지적장애 아이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닌 관심이에요. 먹는 것도, 걷는 것도 문제없지만 한눈을 파는 순간 위험이 찾아오죠. 이렇게 다른 두 아이를, 아프지 않은 애들과 ‘한 공간’에서 품겠다는 발상은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미경은 ‘다름의 간극’을 좁힐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린이집 교사들이 함께 고민을 나눴다. 그 과정에서 미경이 찾은 답은 ‘존중’이었다.  뇌성마비 아이가 천천히 걸을 땐 다른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지적장애 아이가 한눈을 팔 땐 ‘관심’을 권했다.

존중은 다름을 이해하는 언어였고, 그건 평등의 씨앗이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존중의 가치만 있다면 간극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배웠어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가치였죠.”

학생들이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작성한 겨울들살이 시간표. 무지개빛청개구리에는 아이들이 계획한 활동들이 많다. [사진=오상민 작가]
학생들이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작성한 겨울들살이 시간표. 무지개빛청개구리에는 아이들이 계획한 활동들이 많다. [사진=오상민 작가]
“발 모으고, 손 모으고, 인사.” 무지개빛청개구리의 종례시간이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다. 서로에게 절을 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춘다. [사진=오상민 작가]
“발 모으고, 손 모으고, 인사.” 무지개빛청개구리의 종례시간이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다. 서로에게 절을 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춘다. [사진=오상민 작가]

# 8장. 또 다른 엄마의 길 

“이전에 어린이집 선생님이셨어요?” 
“네, 우리어린이집에서 근무했어요.” 
“전 송파 꿈나무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반갑습니다.” 

 
1995년 미경은 옆지기와 결혼했다. 1997년과 2000년엔 별 같은 두 아이를 낳았다. 옆지기의 직장 탓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느라 어린이집을 떠나야 했지만 ‘섬김과 존중의 가치’를 내려놓진 않았다. 

내 아이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슴에 똑같이 품고 키웠다. ‘품앗이 공동육아’를 통해서였다. 송파 꿈나무학교 교사를 만난 건 2000년 6월 둘째 아이의 ‘공동육아조합’에서였다.

미경: “꿈나무학교는 좀 어떤가요?” 
선생님: “손이 부족해요. 비닐하우스여서 환경도 열악하고요.”
미경: “네?” 
선생님: “자원봉사자가 안 올 때도 많아요.”


아직도 그런 곳이…. 미경의 머리에 의문이 스쳤다. “내일 가볼 수 있을까요?” 다음날 오후 3시, 문정역 3번 출구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6월 하늘은 습기를 머금은 듯 낮게 깔려 있었고, 땅은 눅눅했다. 흙길을 3~4분 걸었다. 후텁지근했다. 땀이 줄줄 흘렀다.

 

10년 전 비닐하우스 공부방이 있던 문정역 3번 출구 인근 모습. 법조타운이 들어선 지금은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훼밀리아파트만이 사진 속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10년 전 비닐하우스 공부방이 있던 문정역 3번 출구 인근 모습. 법조타운이 들어선 지금은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훼밀리아파트만이 사진 속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높은 훼밀리아파트 밑단으로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꿈나무학교였다. 낡은 출입문을 열었다. 지독한 습기가 숨을 막았다. 어설프게 나눠놓은 공부방과 조리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책을 보고 있었다. “집에서 기껏해야 20분 거리인데, 왜 몰랐을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행동해야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저녁을 책임질게요.”  그때부터 미경은 꿈나무학교를 찾아가 저녁 먹거리를 챙겼다. 무보수 봉사였다. 한번, 두번, 다음엔 네댓번… 횟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낯을 가리던 아이들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부엌에 도란도란 앉아 속상했던 일, 싸웠던 일, 슬펐던 일을 털어놓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아이들은 조금씩 미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경은 ‘엄마’가 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이 엄미경 센터장을 찾아왔다. 꼭 안아주며 다독이는 모습이 엄마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이 엄미경 센터장을 찾아왔다. 꼭 안아주며 다독이는 모습이 엄마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이 가장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아이들의 먹거리다. 유기농 식재료로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준비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여태껏 지켜온 소신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이 가장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아이들의 먹거리다. 유기농 식재료로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준비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여태껏 지켜온 소신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9장. 가족이란 이름으로

모순矛盾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


열악한 환경, 부족한 관심, 편견과 단절…. 2003년 정식교사가 된 미경의 눈에 비친 꿈나무학교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학교는 ‘태생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연령제한이었다. 꿈나무학교엔 ‘초등학생’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떠나야 했다. 

하지만 정작 갈곳이 없었다. 지역에 변변한 청소년센터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곳이 없는데 머물지 마라”, 그건 야박한 모순이었다. 미경은 순리대로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엊그제까지 함께 웃고울던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방글이와 복실이. 엄미경 센터장과 옆지기 이윤복 상임이사의 별명이다. 별명처럼 웃는 모습이 닮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방글이와 복실이. 엄미경 센터장과 옆지기 이윤복 상임이사의 별명이다. 별명처럼 웃는 모습이 닮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 1기 졸업생 승짱(오승관)은 줄 끊어진 기타 7대와 폐타이어로 시작한 밴드의 원조멤버다. 사회복지와 음향 관련 직종에 근무하는 그는 엄미경 센터장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 1기 졸업생 승짱(오승관)은 줄 끊어진 기타 7대와 폐타이어로 시작한 밴드의 원조멤버다. 사회복지와 음향 관련 직종에 근무하는 그는 엄미경 센터장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즐거운가에 비치돼 있는 기타. 관심있는 아이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즐거운가에 비치돼 있는 기타. 관심있는 아이들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문제는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더부살이’에 지친 아이들은 위축됐고, 주체적 자아를 상실해 갔다. 먼발치에서 아이들을 응원하던 옆지기가 2004년 꿈나무학교의 청소년부 교사를 맡은 이유였다. 

옆지기는 청소년부에 ‘청개구리’란 이름을 붙였다. 청개구리처럼 좌충우돌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줄이 끊어진 기타 7대와 폐타이어를 활용해 ‘밴드’도 결성했다. 

승짱·감자·마담 등 서로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넌 비닐하우스에 사는 ○○가 아니야. 소중한 인격체야.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널 지켜줄 거야”란 의미에서였다. 교사도 별명으로 불렸다. 웃는 모습이 동그랗고 예쁜 미경은 방글이, 미소가 귀엽고 매력적인 옆지기는 복실이가 됐다. 

변화는 조금씩 굽이쳤다. 아이들은 어깨를 폈다. 즐겁게 기타를 치고, 흥겹게 폐타이어를 두들겼다. 아이들끼리의 끈은 더 단단해졌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챙기고, 작은 아이는 더 작은 애를 살폈다. 청개구리는 그렇게 ‘큰 울타리’를 만들어갔다. 가족이었다. 

엄미경 센터장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때 웃음이 많아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엄미경 센터장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때 웃음이 많아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의 한 학생이 엄미경 센터장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다. 스스럼 없는 모습이 엄마와 딸 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의 한 학생이 엄미경 센터장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다. 스스럼 없는 모습이 엄마와 딸 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겨울들살이에서 뿅망치 대결을 하고 있는 학생들. 아이들은 서로를 살피고 돕는다. 또 다른 가족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겨울들살이에서 뿅망치 대결을 하고 있는 학생들. 아이들은 서로를 살피고 돕는다. 또 다른 가족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10장. 편견, 짓밟힌 꿈

“2006년까지 비닐하우스를 떠나야 합니다.” 아이들의 울타리가 단단해지던 그 무렵, 꿈나무학교에 한장의 ‘공지문’이 내려왔다. 학교를 ‘비닐하우스 밖으로 이전하라’는 거였다. 지역아동센터 법제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초등부는 정부지원금을 받고 교회 부지로 이전했다. 문제는 청소년부 ‘청개구리’였다. 서둘러 비닐하우스를 떠나야 했지만 갈 곳도, 갈 돈도 없었다. 고민 끝에 ‘민간자금’을 받아보기로 했다. 1기 졸업생 승짱(오승관)과 감자(김태곤)가 사적인 일을 미뤄놓고 제안서를 만들었다. 오롯이 동생들을 위해서였다. 

‘즐거운가’ 입구에 적혀있는 입장 방법. ‘나 오늘 괜찮다’고 감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즐거운가’ 입구에 적혀있는 입장 방법. ‘나 오늘 괜찮다’고 감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미경과 옆지기는 두 졸업생의 기특한 헌신에 힘을 보탰다. ‘청개구리’ 앞에 무지개빛을 넣어 지역청소년센터의 새 이름을 지었다. 이게 바로 지금의 ‘무지개빛청개구리’다.

심사위원들이 비닐하우스에 실사를 나왔을 땐 ‘연주회’도 열었다. 아이들은 희망과 꿈을 두드렸다. 심사위원들은 ‘절실함’에 높은 점수를 줬고, ‘무지개빛청개구리’는 1억여원의 전세지원금을 받았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비닐하우스를 떠나는 것만으로 기뻤다. 몇몇 아이들은 ‘새집’을 직접 찾겠다며 송파 골목길을 누볐다. 아이들은 달과 별이 빛나는 그런 곳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무지개빛청개구리’가 자리를 잡은 그곳엔 ‘못된 편견’이 웅크리고 있었다.

겨울들살이에서 트램펄린을 즐기고 있는 학생들. 무지개빛청개구리는 아이들이 힘차게 뛰어오를 수 있도록 든든한 발판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겨울들살이에서 트램펄린을 즐기고 있는 학생들. 무지개빛청개구리는 아이들이 힘차게 뛰어오를 수 있도록 든든한 발판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11장. 꿈의 공간 ‘즐거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도 ‘꽁초’를 버린 아이들 취급을 받았다. 벽돌 하나만 깨져도 ‘그쪽 아이들 짓이 아니냐’는 왜곡된 시선이 쏟아졌다.  

자랑거리였던 ‘밴드’는 애물단지가 됐다. 방음벽을 설치하고, 전자 드럼까지 샀지만 ‘소음 때문에 미치겠다’는 민원이 속출했다. “죄송합니다”며 고개를 숙이는 게 미경의 일상이 됐다. 아이들의 꿈도 짓밟혀 갔다.      

기타 치고, 드럼 치고, 맘껏 웃고 떠들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곳. 아이들을 위한 ‘제2의 공간’이 필요했다. 마침 동네 양말공장 지하에 마땅한 장소가 있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미경과 옆지기가 앞장섰다. 월급 일부를 털어 임대료를 감당하기로 했다. 그러자 보증금을 내겠다는 기업이 나타났다. 마을건설협동조합은 공사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꼬깃꼬깃 종잣돈을 내주는 마을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2010년 6월, 무지개빛청개구리 식구들과 마을 주민이 함께 ‘꿈의 공간’을 만들었다. 공부방‧다락방‧밴드연습실‧춤연습실…,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천상의 놀이터였다.

미경과 옆지기는 이곳을 ‘즐거운가’라고 명명했다. 즐거운가家, 즐거운가加, 즐거운가歌….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이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잔치를 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밖까지 퍼졌다. 그래, 이곳야말로 ‘즐거운가家’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 ‘즐거운가’에서 한해를 정리하는 소소한 파티가 열렸다. 이곳은 연극, 공연, 전시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 ‘즐거운가’에서 한해를 정리하는 소소한 파티가 열렸다. 이곳은 연극, 공연, 전시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서 진행하는 미술시간. ‘지니(별명)’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스케치하고 있다. 무지개빛청개구리는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연계·지원해줄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무지개빛청개구리에서 진행하는 미술시간. ‘지니(별명)’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스케치하고 있다. 무지개빛청개구리는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연계·지원해줄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밴드 연습실에서 ‘용빠(별명)’가 드럼을 치고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 ‘즐거운가’에선 소음 따윈 걱정할 필요 없다.[사진=오상민 작가]
밴드 연습실에서 ‘용빠(별명)’가 드럼을 치고 있다. 아이들의 놀이터 ‘즐거운가’에선 소음 따윈 걱정할 필요 없다.[사진=오상민 작가]

#12장. 희망의 노래 

숱한 곡절曲折이 발목을 잡았지만 무지개빛청개구리는 꿈을 잃지 않았다. 지난해 말엔 ‘구립 전환’이라는 큰 선물도 받았다. ‘즐거운가’는 어느덧 마을의 명물이 됐다. 공연·연극·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그렇다고 현실의 어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다. 아이들의 꿈에 써야 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즐거운가의 만만찮은 임대료를 감당하는 건 여전히 벅찬 일이다. 부족한 임대료를 1기 졸업생 승짱(오승관 모두문화협동조합 대표)이 달마다 메꾸고 있는 건 뼈아픈 대물림이다. 

“자기 삶을 즐길 만한 자격이 있는 아름다운 청년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삶의 일부를 희생하고 있죠. 아픔의 대물림을 끊지 못한 건 제 책임인 것 같아요.” 미경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한명의 잘못일 순 없다. 욕망이 들끓고 탐욕이 거래되는 세상을 만든 건 우리의 실책이자 사회의 오류다.

승짱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아픔의 대물림이 아닙니다. 그저 맞서야 할 삶일 뿐이죠. 제게 임대료를 내달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내는 겁니다. 가족이니까요.” 

미경과 옆지기가 마주 보며 웃었다. 꿈을 이어받은 승짱이 미소를 머금었다. 무지개빛청개구리에 꿈이 포개졌다. 희망이 꿈틀댔다. 마침내 일곱 빛깔 무지개가 펼쳐졌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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