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격해지는 세력 다툼
오너리스크 꼬집던 KCGI, 의문의 전략

행동주의 펀드 KCGI와 한진그룹이 3월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인다. KCGI 측은 “이번엔 승리할 것”이라면서 자신하지만 결과는 예측불가다. KCGI의 명분이 지난해보다 약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KCGI는 오너리스크라는 한진그룹의 고질적인 약점을 활용해 주주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올해는 어렵게 됐다. 오너 리스크의 핵심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손을 잡으면서다. 적과의 동침인지, 어쩔 수 없는 전략적 제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뒷맛이 씁쓸한 면이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갈수록 격해지는 한진그룹의 세력 다툼을 취재했다. 

한진칼 주주총회를 앞두고 KCGI를 중심으로 한 주주연합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이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사진=연합뉴스]
한진칼 주주총회를 앞두고 KCGI를 중심으로 한 주주연합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이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사진=연합뉴스]

“투기자본이 국적 항공사 대한항공을 보유한 한진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려 한다.” 2018년 11월 15일 등록된 이 공시 자료에 재계가 들썩였다. 사모펀드 운용사 KCGI가 만든 투자목적 회사인 그레이스홀딩스가 한진칼의 지분 9%를 취득했다는 이유에서였다. KCGI는 단숨에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17.8%)에 이은 한진칼의 2대 주주가 됐다.

논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KCGI가 “경영권 장악 의도는 없다”며 직접 진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주주행동주의를 자임한 이 운용사는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기업가치 제고, 지속가능 경영과 주주이익 증대가 우리의 사명”이라면서 “단기 이익을 노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진그룹의 중장기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도한 배당요구를 하거나 단기 주가상승을 노리기 일쑤인 외국계 사모펀드와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이름에도 이런 의도를 드러냈다. KCGI는 ‘한국기업 지배구조 개선(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의 줄임말이었다. 국내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로 알려진 강성부 대표가 설립한 운용사란 이유에서 ‘강성부 펀드’로도 불렸다.

KCGI의 거센 견제

이후에도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보였다. 이들은 2019년 1월 “한진그룹을 국민의 품으로 다시 되돌리자”면서 ‘한진그룹 신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다. 여기엔 ‘지배구조위원회 설치’ ‘회사 평판 실추 임원의 취임 금지’ ‘비핵심 자산 매각’ 등 구체적인 경영 개선안을 담았다.

당시 여론과 개인주주는 KCGI의 제안에 환호했다.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연이은 갑질 사건에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 계열사 진에어는 신규 노선 허가 제한 등의 국토부 제재를 받을 정도로 갑질 사건의 여파는 컸다. 특히 KCGI가 제안한 ‘회사 평판 실추 임원의 취임 금지’는 각종 일탈 행위로 물의를 빚은 한진그룹 오너 일가를 정면으로 겨냥한 내용이었다.

이처럼 오너일가의 모럴 해저드와 경영 실패는 KCGI 행보의 중요한 명분이 됐다. 이 운용사가 ‘밸류 한진’이란 웹사이트 개설하고 소액주주의 세勢를 공개적으로 규합하고 나섰던 이유이기도 하다.

덕분에 2019년 3월 열린 주주총회에서 KCGI는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조양호 회장의 측근인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의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록 표 대결에선 밀렸지만, KCGI의 견제는 계속됐다. 조양호 전 회장의 퇴직금 지급 문제와 장남인 조원태 회장의 선임 과정을 두고 검사인 선임을 신청하는 등 오너 일가에 의해 그룹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점을 지적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KCGI는 또다시 주총 표 대결을 앞두고 있다. 이번엔 몸집이 더 커졌다. KCGI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반도그룹과 손을 잡고 ‘3자 주주연합’을 구성했다. 조원태 회장의 퇴진과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이 이들의 목표다. 자연스럽게 기존 경영진인 조원태 회장 측과 ‘반反 조원태 연합군’ 간의 대결 양상이 됐다. 양측의 우호 지분율은 각각 39.25%와 37.08%로 박빙이다. 

그런데 KCGI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현 경영진에 비판의 목소리가 컸던 1년 전과는 다르다. 가령 회사 내부 기류는 조원태 회장 측을 더 지지하는 분위기다. 17일 한진칼ㆍ대한항공ㆍ한진 3개 노동조합은 공개적으로 3자 주주연합을 두고 반대 성명서를 냈다. 이들은 “투기 펀드에 몰려든 돈을 불려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고자 혈안이 돼있다”며 “KCGI의 한진그룹 공중 분할 계획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한국형 주주행동주의 펀드’로 지배구조 개혁가의 이미지를 고수하던 KCGI가 1년 만에 그저 그런 ‘투기 펀드’로 평가절하 됐다. 이유가 뭘까. KCGI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살펴보면서 알아보자.

■성과 뚜렷했지만… = KCGI의 공세는 한진그룹을 변화시켰다. 지난 7일 한진그룹이 꺼내든 ‘비전 2023’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를 위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를 위한 거버넌스위원회 신설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한 호텔ㆍ레저 사업 구조조정 및 비핵심ㆍ저수익 사업 정리 등의 고강도 쇄신안이 담겼다.

흥미롭게도 KCGI가 제시한 ‘5개년 계획’과 엇비슷하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KCGI의 계획과 비교하면 평판을 떨어뜨린 임원 취임 금지, 보상위원회 설치 등이 빠지긴 했지만 배당성향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등 파격적인 요소도 있다”면서 “자산을 매각해 부채비율을 낮추고 운송사업에 집중하겠다는 큰 방향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KCGI는 대한항공의 재무구조를 빌미 삼아 한진그룹을 꾸준히 도마에 올렸다. 항공사의 특성상 항공기 리스 방식, 인건비 처리, 퇴직연금 제도 등을 고려하더라도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은 유별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과거 한진해운에 막대한 자본 지원에 나선 이후 재무가 악화됐다는 점을 떠올리면 KCGI의 지적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최근 ‘한진그룹 정상화를 위한 주주연합 기자간담회’를 연 강성부 KCGI 대표는 “대한항공의 부채비율(861.9%)은 코스피20 기업 중 1위”라면서 “부채비율이 높아서 이자비용으로만 연간 5464억원을 낭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진그룹은 현재 경영권 분쟁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진그룹은 현재 경영권 분쟁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결국 한진그룹은 부채비율을 낮출 만한 강도 높은 쇄신책을 꺼내야만 했다. 동시에 주총 표 대결을 앞두고 주주들의 지지 확보도 절실했다. 이렇게 보면 KCGI가 한진그룹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쇄신안 현실화 쉽지 않은데… = 정작 KCGI는 한진그룹의 쇄신안을 두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강 대표는 “지난해 KCGI에서 제안했던 것들을 다시 포장해 아전인수격인 경영쇄신안을 발표한 셈”이라면서 “대한항공의 부채비율 이슈는 처음 한진칼에 투자를 했을 때부터 문제제기를 했는데, 오히려 더 악화됐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항공업계는 KCGI의 비판에 고개를 갸웃한다. 쇄신안 발표로 KCGI의 제안이 일정 부분 받아들여졌고 현실화하는 건 시간문제인데, 당장의 성과를 보이라는 건 무리한 지적이 아니냐는 거다.

가령 KCGI가 “매각하라”고 요구했던 송현동 부지의 경우 셈법이 복잡하다. 이 땅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금싸라기 부지란 이유로 5000억원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 속해 건물을 지을 땐 문화재위원회 심의가 필요해 개발이 여의치 않다. 저층 고도제한까지 있어 민간에선 매수자를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종로구는 이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할 방침을 세웠지만, 예산부족을 이유로 정부와 시에 손을 벌렸다. 하지만 정부와 시 모두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만큼 “부지를 매각한다”고 선언해도 금세 팔릴 리 없다. 비핵심 자산 정리 대상에 오른 왕산레저개발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요트계류장을 운영하면서 매년 적자를 내고 있는 기업에 지갑을 열 인수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

■KCGI의 조현아 리스크 = 오히려 주총을 앞두고 스텝이 꼬이고 있는 건 KCGI다. 3자 주주연합은 4명의 사내이사 후보군을 제안했는데, 이중 김치훈 전 한국공항 상무가 후보 사퇴 의사를 밝히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다.

KCGI는 김 전 상무의 갑작스러운 사퇴를 두고 ‘건강상의 이유’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상무가 “3자 연합이 주장하는 주주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며, 본인의 순수한 의도와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한진그룹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오히려 동료 후배들로 구성된 현 경영진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해명하면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개인 투자자를 결집할 ‘명분’도 잃었다는 분석이다. 과거 오너 리스크에 따른 기업 가치 훼손을 비난하던 KCGI가 ‘땅콩 회항’ 이슈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조현아 전 부사장과 손을 잡으면서다. 

KCGI는 조 전 부사장의 대표사업인 호텔업을 “부채비율 상승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호텔 계열사의 일괄 매각을 주장했을 만큼 악연이 깊다. 이들의 협업이 그룹 경영권 장악을 위한 이합집산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누구를 위한 연합인가

금융업계 관계자는 “사모펀드는 자본력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외부의 투자자를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명분과 전략이 분명해야 한다”면서 “KCGI의 경우 그 명분이 오너일가의 모럴 해저드였는데, 조 전 부사장과 협업하게 되면서 흐릿해졌다”고 꼬집었다.

올해 주총은 지난해보다 더 치열한 표 대결이 벌어진다. 만약 KCGI를 비롯한 주주 연합이 승기를 거머쥔다 해도 한진그룹은 도돌이표다. 주주연합의 핵심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입김을 피하기 어려워서다.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이 그룹의 중장기 발전을 담보할지도 미지수다. 결과가 어떻든 KCGI의 한진그룹 개혁은 쉽지 않을 거란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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