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거주민을 위한 표지판도 없었다

비영어권 영화가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서울시는 빠르게 영화의 배경이 됐던 촬영지를 공개했다. 주인공 가족의 동네로 묘사된 골목길과 가게ㆍ계단 등이다. 그러자 우려도 커지고 있다. 골목길 관광이 주민에게 고통을 준 게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해까지 이를 보완할 기준이 나온다지만, 관광객들이 강제성 없는 기준에 나름의 ‘선線’을 지킬 수 있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골목관광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들춰봤다.  

이화벽화마을은 이전부터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았다.[사진=뉴시스]
이화벽화마을은 이전부터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았다.[사진=뉴시스]

2020년 오스카는 역설적으로 ‘로컬(지역적Local)’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기생충이 상을 휩쓸었다. 그 덕에 국내 촬영지까지 들썩였다. 서울시는 빠르게 촬영지를 공개했다. 기회를 계속 빼앗긴 탓에 중산층에서 ‘없는층’으로 전락해버린 주인공 가족의 동네, 그 가족이 자주 가는 슈퍼마켓, 부업거리를 받아오던 피자가게, 비 오는 날 뛰어내려가던 계단 등이다.

영화에 등장한 두곳의 가게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점포다. 촬영지가 공개된 이후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며 매출이 조금 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 서울시는 ‘팸투어(인플루언서관공서 등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답사 여행)’까지 언급하며 영화 촬영지였던 마포구 아현동 골목길을 한국 영화 관광 코스에 넣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뒷면에선 비판이 제기됐다. 기생충에 숟가락만 얹은 ‘골목의 관광화 전략’이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을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 관광지로 떠오른 탓에 거주민이 고통을 받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유명세를 치른 곳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곳도 숱하다.

그중 대표적인 장소는 2010년부터 유명세를 치른 이화벽화마을이다. 이곳은 관광객이 과하게 몰리는 오버투어리즘(Over Tourism) 탓에 2016년부터 골병이 들기 시작했다. 예술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지울 정도로 부작용이 심각했다. 그로부터 3년여, 이화벽화마을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모처럼 눈이 내리던 17일, 그곳을 찾았다. 대학로 평지에 붙어있는 ‘이화벽화마을로 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갔다. 표지판이 안내하는 ‘이화벽화마을까지 남은 길’은 500m, 300m로 계속 줄어들었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며 계단을 돌아 올라갔다. 눈 덮인 계단의 끝에 오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1980년대 교복을 입은 작은 마네킹 두개였다. 의상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광고판이었다. 여전히 골목은 포토 스팟이었다.
 
교복 대여가게를 지나쳐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담벼락에는 코로나19 주의사항을 안내하는 대형 현수막이 영문과 중국어로 두개씩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카페는 대부분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카페 앞에 놓인 관광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골목길 투어 코스를 소개하는 약도였다. 주민이 사는 거주지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문구는 없었다.

여전히 관광객 몰리는 마을

낙산 성곽까지 계단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안을 살펴봤다. 흰색 페인트로 발라진 벽에 물고기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 물고기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낙서들이었다. 2020년 12월 중에 쓰인 문구도 흔했다. 벽에 글을 써도 괜찮다고 쓰여 있는 안내문은 없었다.

벽화를 살펴보던 중, 택시 한대가 멈춰 섰다. 4명의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가 택시에서 내렸다. 손에는 고프로와 캠코더를 든 채였다. 관광객들은 안내판의 약도를 꼼꼼히 살피더니 사진을 찍으며 골목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벽화마을의 물고기 벽화는 관광객 낙서가 뒤덮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벽화마을의 물고기 벽화는 관광객 낙서가 뒤덮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낙산 성곽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에 다른 안내판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얼어붙은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던 도중 위에서 내려오는 일본인 관광객 대여섯명과 마주쳤다. 계단 위 전봇대에는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표지판이 높이 매달려있었다.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음성에 그들을 잠깐 불러 세웠다. 표지판을 가리키며 “저 표지판 보이나요?(Can You see that sign?)”이라고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듯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다가 골목 아래로 사라졌다.

일본인 관광객을 뒤로하고 계단이 뻗어있는 대로 발을 옮겼다. 올라가면서 본 ‘조용히 해주세요’ 안내문은 하나였지만 코로나19를 주의하라는 포스터와 대형 현수막은 한손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표지판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2019년 7월에는 ‘관광진흥법 일부 개정 법률안(정세균 의원 대표 발의)’이 통과되며 거주지 관광을 규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겼다. 그해 말, 서울시도 골목길에 ‘관광허용시간 제도’ 등을 도입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6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에 맞춘 시행규칙을 준비해 발표할 예정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행규칙이 만들어져야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만들 수 있다”며 “조례가 개정된다면 ‘방문시간’을 지정해 주민 불편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올해까지 조례를 개정하고 주민들의 요구가 있다면 의견을 수렴해 관광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라고 보긴 어렵다. 북촌 한옥마을은 이미 관광허용시간을 적용하고 있다. 다른 날, 북촌 마을안내소에 찾아가 북촌 관광 안내 팸플릿을 확인했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안내문은 있었지만 관광허용시간 제도를 설명하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후 5시로 방문 시간이 따로 있기는 하다”며 “권고이기 때문에 조용히 돌아다닌다면 괜찮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지키지 않더라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는 거다.

서울시는 ‘플란다스의 개’ ‘괴물’ ‘옥자’ ‘기생충’ 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 촬영지를 관광 코스로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영화 기생충 속 성공한 IT 기업 CEO 박동익의 집은 높은 언덕 위, 벽돌담으로 만들어져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다. 집 안을 훔쳐보려면 산을 타고 쌍안경을 꺼내 들어야 가능하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의 집은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선線이 없어 무방비로 노출된다. 조례 이후 만들어질 기준은 골목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선이 돼줄 수 있을까.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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