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여행 약관 “전염병은 천재지변이 아니다” 
이상한 여행 약관 “전염병은 천재지변이 아니다” 
  • 최아름 기자
  • 호수 379
  • 승인 2020.03.11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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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약관의 이상한 위약금 면제 조항 

코로나19, 전 대륙으로 퍼져가면서 팬데믹(세계적 전염병 대유행)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이 정도면 천재지변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전염병은 국내에서 ‘천재지변’으로 인정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전염병 때문에 여행을 취소하려 해도 환불 수수료를 내야 한다. 코로나19가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사유’로 인한 위약금 면제 조항(2018 여행 약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여행 약관의 이상한 위약금 면제 조항을 취재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로 번지며 여행 취소가 있다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환불 수수료를 내야 한다.[사진=뉴시스]
코로나19가 전세계로 번지며 여행 취소가 있다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환불 수수료를 내야 한다.[사진=뉴시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긴장 상태다. 확진자가 가파르게 늘어난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거리에 돈도 사람도 돌지 않는다. 변곡점은 2월 18일이었다. 이날 국내에서 31번 환자가 확진 판정 이후 2월 초까지 20명대를 유지하던 코로나19 확진자가 수백명 단위로 늘기 시작했다. 외부에 행적을 드러내길 꺼리는 특정 종교집단의 특성과 전파력이 강한 코로나19가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자 일부 국가는 한국을 입국금지국가로 지정하기도 했다. 1월 28일 파푸아뉴기니가 코로나19와 관련해 의료기록 증명서 제출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6일 현재까지 ▲한국을 입국금지국가로 지정하거나 ▲자국에 입국한 한국인을 14일 이상 격리조치하는 곳은 총 58개국이다.

해외 여행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여행상품을 취소하면, 일반적으로 출국일을 기준으로 남은 기간에 따라 환불 수수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입국제한조치 혹은 격리조치를 하는 국가의 경우엔 일정을 취소하더라도 환불 수수료가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행을 가려는 국가가 입국제한 조치를 취하진 않았지만 감염 위험이 있어 예약자가 먼저 여행을 취소하고 싶을 때다. 전염병은 인력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환불 수수료를 물지 않아도 될까. 사례별로 답을 찾아보자.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천재지변’이다. 여행사들은 통상 ‘천재지변’을 이유로 예약이 취소됐을 경우 수수료를 청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천재지변은 폭우ㆍ지진ㆍ태풍 등 기상청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경우를 말한다.

 

2018년 천재지변으로 인한 위약금 면제 조항이 신설됐지만 효과는 미미하다.[사진=뉴시스]
2018년 천재지변으로 인한 위약금 면제 조항이 신설됐지만 효과는 미미하다.[사진=뉴시스]

코로나19는 천재지변일까 =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어디에 해당할까. 현재 시점에선 “천재지변이 아니다”는 게 여행업계의 주장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전염병이 ‘천재지변’으로 인정받은 적은 없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ㆍMERS)도 그랬다. 

팬데믹 인정되면 어떨까 = 그럼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팬데믹(세계적 전염병 대유행ㆍPandemic)으로 규정하면 어떻게 될까. [※참고: 팬데믹은 인류의 감염병 경보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팬데믹이 선언됐던 것은 2009년 신종 플루가 마지막이었다.]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 명확한 법이나 제도가 없어서다. 다만,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규정되면 여행 불가 상태가 되기 때문에 천재지변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천재지변은 누가 결정하는가 = 이 지점에선 한가지 의문이 있다. 그럼 천재지변을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냐는 거다. 여행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메르스든 코로나19든 개별 여행사가 ‘천재지변이니 여행상품을 취소하더라도 수수료가 없다’고 결정할 수 없다. 정부가 결정해주거나 협회 차원에서 합의가 필요하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정부 또는 여러 여행사가 모인 협의체가 ‘천재지변’이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독한 전염병도 ‘천재지변’이 될 수 없다는 거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먼저 환불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이유로 여행 일정을 강행했다가 입국제한조치에 걸려 발목이 잡힌 A씨의 사례를 보자. A씨는 한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않은 B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B국의 정책이 급작스럽게 변경돼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버렸다. 이 경우 환불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미 상품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여행지가 조건부 입국을 허용하는 곳이라도 A씨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가령 여행지가 미국이라면 입국장에서 체온 37.5도를 넘기면 입국할 수 없다. 그래도 환불 수수료 일부는 A씨가 내야 한다. 전면적인 입국 제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A씨가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을 때까지 일정을 미루는 것도 힘들다. 이 경우에도 환불 수수료를 내야 한다. 여행사는 ‘일정을 미루는 것’을 ‘취소 후 재구입’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전염병으로 여행 취소 신청이 쏟아졌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때도 여행을 취소하려는 고객들이 몰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7년 여행 약관에 ‘천재지변 등 여행자의 귀책 사유가 아닌 불가피한 사유’로 인한 위약금 면제 조항을 넣도록 ‘소비자분쟁해결 기준 개정안’의 시행을 행정예고했다. 이 개정안은 이듬해 2월부터 적용됐다. 

하지만 천재지변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준이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은 탓에 전염병은 여전히 기준선 밖에 있다. 위약금 면제 조항을 이대로 놔둔다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면 여행자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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