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태 막을 수 없었나

매번 똑같았다. 재난이나 극악 범죄가 터지면 세상은 난리를 떨었지만 이내 잊었다. 재발 대책을 논의할라치면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기 일쑤였고, 그 순간을 틈타 범죄의 싹이 다시 텄다.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n번방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수법만 다를 뿐 디지털 성범죄가 도마에 오른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린 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n번방 사태에 숨은 사회적 병폐를 취재했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됐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사진=연합뉴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됐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사진=연합뉴스]

미성년자를 협박했다. 스미싱 파일을 보내거나 아르바이트를 미끼 삼아 개인정보를 확보했고, 성 착취 영상을 촬영했다. 이런 영상이 텔레그램 ‘박사방’이란 공간에서 유포됐다. 그 공간에 있던 이용자는 최소 1만명에 달했고, 100여만원의 회비를 내고 가입한 이도 많았다. 이들 상당수는 영상을 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외부로 유포하거나 ‘성 착취’ 행위에 가담했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극악 범죄의 단면이다. 여성을 협박해 만든 성 착취 동영상이 유포됐고,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만 74명에 이른다. 그중 아동ㆍ청소년이 16명이나 됐다.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이 성범죄 피의자 중 최초로 공개됐던 이유다. 

핵심 범죄자가 검거되고, 얼굴까지 전국에 드러났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여전히 들끓고 있다. ‘박사방’은 빙산의 일각이었기 때문이다. 불법 성 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건 조씨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신상이 공개되기 전 ‘와치맨(텔레그램 닉네임)’이란 운영자는 이미 재판에 넘겨져 검찰 구형까지 받았다. 박사방 유료 회원으로 시작한 16세 청소년 ‘태평양(텔레그램 닉네임)’도 독자적인 공유방을 운영하다 최근 구속됐다. 

텔레그램 성 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사건을 추적한 결과 텔레그램 불법 성 착취물 대화방이 많을 때는 100개까지 존재했고, 그중 최대 3만5000명이 참여한 대규모 방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대화방들은 ‘n번방’으로 통칭되고 있다. SNS 공간의 성범죄가 숱하게 많았다는 증거다.

n번방의 무서운 변주

정부와 각 부처는 제2의 n번방 사태를 막을 조처를 쏟아내고 있다. 검찰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태스크포스(TF)’,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 수사본부’를 각각 구성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아동ㆍ청소년 이용 음란물 관련 범죄의 양형기준을 논의하는 회의를 4월 20일 열 계획이다. 국회에선 여야 가릴 것 없이 ‘n번방 방지법’을 발의하고 있다. 회기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임시국회를 여는 한이 있더라도 꼭 통과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과거에도 비슷한 범죄가 있었고 개선책이 쏟아졌지만 ‘말의 성찬’에 그쳤다. 수법이 악질이라 기상천외한 신종 범죄 같지만, 디지털 공간에서의 성 착취는 이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소라넷’이다. 2000년대 초부터 각종 불법 음란물이 유포ㆍ공유됐지만 2016년에야 폐쇄됐다. 폐쇄 당시 이 사이트의 회원 수는 100만명을 넘었다. 당시에도 국민들의 공분을 샀지만 운영진 6명 중 검거된 이는 3명뿐이었다. 이중 주범은 징역 4년을 사는 데 그쳤다. 

2018년엔 ‘웹하드 카르텔’이 드러났다. 불법 음란 영상물을 올리는 업로더가 활개를 치고 다녔던 이유는 웹하드 업체의 조직적인 관리 덕분이었다. 불법 영상물을 차단ㆍ삭제하는 업체를 동시에 운영하며 피해자를 기만한 웹하드 업체도 있었다. 

합법적인 사업자인 줄 알았던 웹하드 업체가 성범죄 동영상 유통의 중심축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방송통신위원회ㆍ과학기술정보통신부ㆍ여성가족부ㆍ경찰청 등 7개 정부 부처가 모여 ‘웹하드 카르텔 방지 대책’을 내놨던 이유였다. 국회에선 ‘웹하드 카르텔 패키지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소라넷→웹하드→텔레그램’으로 플랫폼만 변하고 본질인 ‘디지털 성범죄’는 더 악랄해졌다. n번방 사태는 예견된 참사였던 셈이다. 

이런 사례는 n번방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깝게는 2018년 10월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이 그랬다. 국민들은 공분했고, 신상이 공개된 가해자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범죄를 막을 예방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면서 법석을 떨었지만 그 외양간이 제대로 세워졌는지 확인하고 검증하는 절차는 생략되기 일쑤였다는 얘기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대형사고 이후의 외양간을 하나씩 살펴봤다.

■틈만 나면 법 완화 요구 = 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부에 구제 신청을 한 피해자가 6754명, 이중 사망자가 1531명(2020년 3월 20일 기준)에 달하는 데도 아직 가해업체 조사와 피해자 구제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처음 사건이 드러났을 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제조업체는 안전점검도 없이 가습기 살균제를 ‘안전한 제품’이라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정부는 이를 사전에 인지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흡입독성자료 요청도 없었고 심지어 일부 가습기 살균제에는 안전인증마크를 찍었다. 

예견됐던 참사들

비난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관련 제도를 손봤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부터 시행된 화학물질의 등록과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살생물제법)의 개정안이다. 모든 살생물제의 유ㆍ위해성을 사전에 검증해 안전한 경우만 시장유통을 허용하는 게 골자다. 화학물질을 총체적으로 감독하는 유럽의 ‘리치(REACH)’ 제도를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국내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수많은 화학물질 제품이 ‘화장품법’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품공법’ 등 여러 부처의 개별법으로 나눠져 있어서다. 부처 간 전문성이 제각각이라 안전관리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때문인지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자 화학성 유독물질인 CMITㆍMIT가 함유된 치약이 시중에 유통되기도 했다. 올해 2월엔 시중에 풀린 100개의 생활화학 제품이 적발됐다. 유해물질 함유 기준을 초과했거나, 안전기준을 확인ㆍ신고하지 않고 탈취제와 방향제 등이었다.

미흡한 예방책이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이마저도 언제 빗장이 풀릴지 모를 일이다. 재계는 꾸준히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화학물질의 유해성 자료 확보와 등록 책임을 기업에 지우는 규제 때문에 신규 투자가 어렵고, 비용 부담도 크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지난해 7월 한일 무역갈등이 불거지자 정부는 화관법 심사 간소화 방안을 내놓기도 했었다. 

■해상 대책만 있으면 뭐하나 = 2014년 4월 16일은 한국 사회 재난 안전 시스템의 부실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날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현장을 지휘해야 할 컨트롤타워는 보이지 않았고, 참사를 예방해야 할 안전규제 장치는 ‘비용 절감’에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세월호 선원의 절반은 비정규직 계약직이었다. 인명 구조 업무도 민간업체에 위탁했다.

이 때문에 ‘제2의 세월호 방지 제도’가 쏟아졌다. 실제로 해양안전 분야에선 규제가 대폭 강화됐다. 과거 한국해운조합이 ‘셀프감독’하던 연안 여객선 선사와 선박을 해양수산부 소속 감독관들이 직접 관리ㆍ감독하게 됐다. 안전규정 위반 과징금도 최대 3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올렸다. 여객선의 선령 제한은 30년에서 25년으로 낮췄다. 복원성 저하를 초래하는 일체의 개조도 금지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대형사고를 안전하게 틀어막을 수 없다. 사고엔 여러 직간접 원인이 그물처럼 얽히기 마련이다. 특히 ‘위험의 외주화’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만연한 관행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관련 사고는 잊을 만하면 되풀이됐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모군,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김용균씨는 모두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 재난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만든 결과다.[사진=연합뉴스]
세월호 참사는 국가 재난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만든 결과다.[사진=연합뉴스]

그럼에도 정부의 개선 의지는 뚜렷하지 않다. 올해 3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고용부에 “작업공정ㆍ작업환경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고 한국의 실제 산업재해 현실을 반영해 도급금지작업의 범위를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위험의 외주화 제도 개선이 시급한 문제이니 해결해달라는 재촉이었다. 하지만 고용부는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겠다”고만 회신했다. 제2의 세월호가 아직도 곳곳에 있다. 

■반복되는 유사 화재 = 2017년 12월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에서 번진 불로 2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달 뒤엔 경남 밀양 세종병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47명이 목숨을 잃고 112명이 부상을 입었다. 건물 내 대형화재가 연달아 발생했던 만큼, 정부는 각종 방화대책을 쏟아냈다. ‘소방 특별점검’ ‘안전 전수조사’ ‘안전교육 강화’ ‘관련 법 개정’ 등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됐다. 화재 사고가 터질 때마다 반복되던 익숙한 대책들이었고, 사고를 막을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쏟아졌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지난해 9월 김포 요양병원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47명이 다쳤다. 이번에도 병원 내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 미작동은 화재가 터질 때마다 뒤늦게 드러나는 고질병 중 하나였다. 간단한 개선책이라도 제대로 챙겼다면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얘기다. 

판박이 같은 사건사고들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이던 허버트 하인리히는 대형 사고가 한 건 터지기 전 경미한 사고가 29회 발생하고, 그 이전에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는 사소한 징후가 300회 나타난다는 점을 포착했다. 5000여건의 산업재해 사례를 분석한 ‘하인리히의 법칙’이다.

앞서 살펴본 대형사고도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다. 사소한 것들을 방치한 결과다. 바꿔 말하면, 작은 감시망만 있다면 큰 사고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n번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지털 성범죄를 우려한 많은 이들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들었다면 피해자가 상처를 받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n번방 이후의 문제를 ‘담론’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악순환의 고리는 또다시 사고를 엮을 게 분명하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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