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 지원론 설득력 있나

정유업계가 ‘사면초가’다. 국제유가는 하락세가 길게 이어지고 있고, 정제마진은 부쩍 줄었다. 코로나19라는 악재까지 겹쳐 수요도 감소했다. 그렇다고 정유사들에 현금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되레 차입금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는 상태다. 그러자 일부에서 ‘정부 지원론’이 거론된다. 설득력 있는 주장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그 답을 찾아봤다. 

정유사들은 투명하지 않은 시장을 조성해 국제유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사진=연합뉴스]
정유사들은 투명하지 않은 시장을 조성해 국제유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사진=연합뉴스]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할 것 같다.” 올해 1분기 실적을 어떻게 예상하는지 묻자 정유업계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전망했다. 전반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앓는 소리’가 아니다. 각종 수치와 정황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국제유가가 너무 낮다. 올해 초(1월 2일 기준) 배럴당 65.44달러였던 두바이유는 4월 15일 기준 21.46달러로 67.2%나 하락했다. 지난 3월 31일 25.72달러를 기록한 이후엔 단 한번도 20달러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저유가 상황은 정유사엔 손해다. 종전에 사놨던 막대한 양의 원유 가치가 떨어지는 거나 다름없어서다. 당연히 실적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저유가 상황이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지난 14일 산유국들이 감산 합의를 했지만, 시장은 수요 위축분보다 공급 조절분이 훨씬 적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산유국들의 감산량보다 수요 감소량이 훨씬 많다는 건데, 사실 감산량이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원유 수요가 회복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산유국 간 점유율 경쟁이 또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유업계를 위기로 빠뜨리는 또다른 원인은 형편없이 낮은 정제마진(원유를 정제해서 석유제품을 제조했을 때의 수익)이다. 지난해 11월 셋째주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이 배럴당 -0.6달러를 기록한 뒤 심상치 않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정제마진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2001년 6월 이후 960주 만이었다. 이후 잠깐씩 회복세를 띠기도 했지만, 4.0달러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등락을 거듭했다. 그러다 3월 셋째주부터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4월 둘째주까지 4주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마진 손익분기점이 통상 배럴당 4~5달러라는 걸 감안하면 심각한 징조임에 틀림없다. 정유업계가 “1분기에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낼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유가와 정제마진 하락, 코로나19 등으로 정유업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저유가와 정제마진 하락, 코로나19 등으로 정유업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뿐만이 아니다. 정유업계에도 코로나19 악재가 겹쳤다. 공장이 멈춰서고, 전세계 이동 인구가 줄면서 석유 수요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제유가가 하락하고, 정제마진이 감소한 것도 문제지만, 수요가 늘지 않는다는 게 더욱 심각한 문제”라면서 “석유제품이 팔리지 않으면 정유사들로선 어쩔 도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걸 알 수 없으니 그게 더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정유사들의 재정 상황마저 신통치 않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정유4사의 순차입금을 살펴본 결과, 평균 순차입금 규모는 4조4875억원이었다. 각 정유사가 가진 현금보다 빚이 4조원 이상 많다는 얘기다. 

정유업 무너지면 한국경제 휘청

게다가 2018년 정유4사(전체 3조9708억원)와 비교하면 13%가 더 늘었다. [※참고 : 순차입금은 총 차입금에서 ‘현금 및 현금성자산’을 뺀 값이다. 이는 신용평가사의 평가 기준이다. 차입금 기재방식은 기업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장ㆍ단기차입금, 유동성장기부채, 장ㆍ단기금융부채, 유동ㆍ비유동차입금 등이 ‘차입금’에 포함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순차입금이 가장 많은 곳은 에쓰오일로 6조889억원이었다. GS칼텍스의 순차입금은 5조4512억원, 현대오일뱅크는 3조4530억원, SK에너지는 2조9568억원이었다. 순차입금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은 SK에너지(35.5%)였다. 그 뒤로 GS칼텍스(14.5%), 에쓰오일(7.4%), 현대오일뱅크(5.7%) 순이었다. 

차입금이 이렇게 늘어난 건 그동안 정유사들이 고도화 설비나 석유화학 설비 등에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만 지금처럼 악재가 골고루 겹쳐 미래가 불투명할 때 차입금이 많고 현금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면 유연한 대응이 어려워진다. 그만큼 정유업계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거다. 

문제는 정유업이 타격을 입으면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점이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수입ㆍ정제해 다시 수출한다. 정유업이 타격을 입으면 수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석유제품은 반도체ㆍ자동차ㆍ자동차부품ㆍ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여전히 주요 수출품목 중 하나다. 

지난해 전체 수출액은 5422억3261만 달러였는데, 석유제품(HS코드 2710 기준) 수출액은 392억8001만 달러(7.2%)였다.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또다른 사슬도 있다. 석유제품 수출이 줄면 원유 수입은 더 많이 감소하게 마련이다. 제품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원재료를 더 들여오긴 힘들어서다. 

당연히 석유제품 생산량이 줄고, 공장 가동률은 떨어지며, 투자ㆍ고용ㆍ소비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없지 않다. 재계 안팎에서 “정유업이 무너지면 그 파장은 항공업이나 관광업 등이 무너지는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클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정부가 정유업계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정유사 지원해야 할까

하지만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다고 ‘정부 지원론’부터 거론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정유업계는 제조업 중에서 고연봉 직군으로 분류된다. 지난해 기준 정유4사의 남자 정직원(정유 부문)의 평균 연봉은 1억원이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정유4사 가운데 연봉 조정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곳은 현대오일뱅크 1곳뿐이다[※참고 : 현대오일뱅크는 지난 3월 임원 급여 20%를 삭감했다.] 

나머지 3사 측은 “연봉 조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더구나 정유4사는 불투명한 판매구조로 국제유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별다른 개선을 하지 않았다. 성태윤 연세대(경제학) 교수는 “경제 상황이 안 좋은 만큼 기업의 일자리 안정을 위해서 정부 지원은 분명 필요하다”면서도 “하지만 그 이전에 고연봉을 받는 직종의 경우 임금조정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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