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텔루라이드 수상의 의미

기아차 텔루라이드가 세계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사진=기아차 제공]
기아차 텔루라이드가 세계 올해의 차로 선정됐다.[사진=기아차 제공]

기아차는 한때 해외 소비자로부터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낮은 차’라는 조롱을 받았다. 미국 코미디언은 기아차를 ‘신발’에 비유해 풍자를 늘어놓기도 했다. 꾸준히 신차를 출시하면서 해외 시장을 노크해온 기아차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변곡점變曲點은 기아차가 ‘디자인 경영’을 선포한 2006년에 형성됐다. 이 해를 기점으로 세계 유수의 디자인 시상식에 이름을 올리더니, 최근엔 텔루라이드가 ‘2020 세계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신발 취급받던 기아차가 ‘세계차’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기아차의 반전 스토리를 취재했다. 

“렌터카 카운터 직원이 말했습니다. ‘손님, 제가 기아로 업그레이드해 드리겠습니다.’ 손님이 답했죠. ‘뭐에서요? 제 신발에서요?’” 미국의 코미디언 폴 바게스가 스탠드업 코미디쇼에서 활용하는 ‘기아차 조크(Kia Joke)’다. 여러 이동수단 중 기아차의 차는 신발만큼 수준이 낮다면서 비꼬는 농담이었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빵빵 터졌다. 

국내에선 시장점유율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기아차지만, 해외 소비자의 평가는 냉담했다. 특히 2000년 현대차그룹 편입 이후 현대차와 플랫폼(차체 뼈대)ㆍ엔진ㆍ변속기 등을 공유하면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기아차의 수난시대

2014년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아차는 현대차의 그림자 속에 있다(Kia Keeps Being Overshadowed by Hyundai)’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성능은 비슷한데 왜 현대차가 아닌 기아차를 사야 하는가”란 질문에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기아차의 최근 위상은 다르다. 이 회사의 북미 전용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텔루라이드’가 ‘2020 월드카어워즈(WCA)’에서 ‘세계 올해의 자동차’로 선정된 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WCA는 ‘북미 올해의 차’ ‘유럽 올해의 차’와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상으로 꼽힌다. 각국에서 활약하는 자동차 저널리스트 86명으로 꾸려진 심사위원단의 평가와 비밀투표를 통해 뽑힌다. 한국차가 이 상을 받은 건 텔루라이드가 처음이었다. 

기아차의 SUV를 치켜세운 건 WCA만이 아니다. 텔루라이드는 ‘2020 북미 올해의 차’ SUV 부문에서 최종 선정됐다. 현대차 ‘팰리세이드’, 링컨 ‘에비에이터’ 등과 경합한 끝에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북미 올해의 차는 ‘차 업계 오스카상’으로 불린다. 미국과 캐나다 자동차 전문 기자단의 투표로 선정되는 만큼 탄탄한 공정성,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텔루라이드로선 세계 3대 자동차 시상식 중 2개의 최고상을 휩쓴 셈이다. 이밖에도 이 차는 국내외 70여개의 자동차 분야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세계의 조롱거리에서 ‘세계 올해의 차’로 선정되는 대변신을 이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05년 11월로 시계추를 돌려보자. 당시 기아차는 야심차게 준비하던 신차 ‘로체’를 내놨다. 로체는 ‘쏘나타’와 같은 엔진을 탑재해 성능에서 뒤질 게 없었는데도 가격은 100만원가량 쌌다. 

기아차 조크에서 올해의 차 수상까지…

그럼에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내수시장에서 월 평균 2000여대 팔리는 데 그쳤다. ‘옵티마’란 이름으로 수출된 미국 시장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로체가 수출길에 오른 2005년 미국 시장조사업체 JD파워가 실시하는 미국 시장 신차품질조사(IQS)에서 기아차는 37개 브랜드 중 31위에 그쳤다. IQS는 소비자들이 신차를 구입 후 90일 동안 경험한 각종 문제점을 지수화한 조사인데, 그만큼 기아차의 평판은 바닥에 가까웠다. 당시 ‘형님’ 격인 현대차는 11위를 기록했다. 

미국의 과학매거진 파퓰러메카닉스도 당시 기아차의 모습을 아프게 묘사했다. “‘아만티(오피러스 수출명)’는 ‘E클래스의 아류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세도나(카니발 수출명)’는 ‘쉐보레 타호(대형 SUV)만큼 무거운 고철’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기아차의 수장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당시 기아차 사장)이었다. 정 부회장은 2006년 파리모터쇼에서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면서 기아차의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기아차 브랜드를 표현할 수 있는 독자적인 디자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차량 라인업의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하고 감각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세계무대에서 기아차의 경쟁력을 향상할 것이다.”

 

이는 말의 성찬盛饌에 그치지 않았다. 기아차는 아우디ㆍ폭스바겐의 수석디자이너로 일하던 피터 슈라이어를 데려와 부사장에 앉혔다. 슈라이어는 당시 크리스 뱅글(BMW), 발터 드 실바(아우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아우디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며 ‘TT’ ‘A6’ 등 아우디의 디자인 변혁을 주도했다. 정 부회장은 그런 슈라이어 부사장에게 디자인의 전권(최고디자인책임자)을 맡겼고, 이때부터 기아차는 독자 디자인 개발에 착수했다. 

낡은 인프라를 혁신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정 부회장은 2007년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건설한 기아차 유럽총괄법인 신사옥에 단독 유럽디자인센터를 들여놨다. 2008년 6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기아차 미국 디자인센터를 짓도록 했다. 

2010년 2월엔 기아차 조지아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렇게 4년여, 기아차는 조금씩 성과를 냈다. ‘쏘울’이 2008년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히는 레드닷 디자인상 자동차 분야에서 장려상(Honorable Men tion)을 받으면서다. 한국차가 3대 디자인상에서 수상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세대 쏘울’이 거둔 성과는 더 빛났다. 레드닷뿐만 아니라 iFㆍIDEA 디자인상까지 모두 석권하며 ‘그랜드 슬램(2014년)’을 달성했다. 이후로도 기아차는 3대 디자인상에서 매년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iF 디자인상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수상했다. 

디자인만 호평을 받은 게 아니다. 기아차는 한때 31위(2005년)에 그쳤던 JD파워 IQS 조사에서도 2014년 13위, 2015년 2위 등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맏형 현대차(2015년 4위)를 따돌린 놀라운 반전이었다. 2016년엔 포르쉐까지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이후에도 2017년(1위)ㆍ2018년(2위)ㆍ2019년(1위)로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복도 잇따랐다. 기아차의 첫 프리미엄 스포츠 세단 ‘스팅어’가 2018년 세계 3대 자동차 상 최종후보에 모두 이름을 올리면서다. 이가운데 ‘유럽 올해의 차’는 유럽연합(EU) 자동차 기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스팅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브랜드와 차종이 경쟁하는 유럽 시장에서 최종후보 7종 중 하나로 선정됐다. 후보 차량 중 비非유럽 브랜드는 기아차가 유일했다. 스팅어는 ‘2018 북미 올해의 차’에서 세단 부분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세계 올해의 차’ 최종후보 10종 중 하나에도 선정됐다. 
 

기아차 관계자는 “비록 3개의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스팅어의 품질이 세계시장을 달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매년 쟁쟁한 신차가 ‘올해의 차’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만큼, 최종 후보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바늘구멍’이다.

이런 면에서 올해 텔루라이드의 ‘북미 올해의 차’ ‘세계 올해의 차’ 연속 수상은 함의含意가 크다. 최종후보에 올라 수상 문턱에서 안타깝게 미끄러지던 역사를 극복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브랜드 경쟁력의 근본인 ‘품질’에서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때는 ‘신발보다 한 단계밖에 높지 않은 이동수단’으로 조롱받던 기아차의 위상은 이제 180도 달라졌다. 판매량도 수직증가했다. 2005년 27만대에 그쳤던 기아차의 미국 판매량은 지난해 61만대를 기록했다. 기아차의 반전은 계속되고 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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